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8.21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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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에 수많은 해양인력이 희생되었다. 중세 유럽사회가 전쟁이 잦고 만연되는 질병, 영양부족이라는 악조건의 사회이었다지만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항해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미스테리이다. 사진은 KBS 4부작 ‘바다의 제국’ 한 장면.
대항해시대에 수많은 해양인력이 희생되었다. 중세 유럽사회가 전쟁이 잦고 만연되는 질병, 영양부족이라는 악조건의 사회이었다지만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항해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미스테리이다. 사진은 KBS 4부작 ‘바다의 제국’ 한 장면.

 

섬과 섬 사이를 왕래하는 연락선이 범선에서 새로운 과학기술로 지어진 금속 증기선으로 바뀐 것이다. 배는 사람과 화물을 싣고 빠른 속력으로 오갔다. 그리고 풍향에 관계없이 파도를 마구 헤치며 나아갔다. 선수와 뱃전에 이는 흰 파도의 물결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존중받아야 할 자연을 저렇게 함부로 대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문화충격이 우리 사회에서도 있었고 서구사회에서도 있었지만 그 결과는 많이 다르다. 서구는 산업혁명과 함께 경제사회에 대한 철학과 이념이 수많은 긴장과 갈등 속에서 진행되어 오늘날의 과학문명 기술 사회를 이루었고, 우리는 그들이 이룬 최종 결과물 앞에서, 마치 수업을 마친 학업에는 별 관심이 없는 학생에게 주어진 무거운 숙제처럼 망연자실해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1885년 4월 15일에 거문도 앞바다에 떠있던 영국군함은 거문도에 해병대를 상륙시켰다. 그들의 행동은 참으로 일사불란했다.

4. 그들은 어떻게 대양을 건너 왔는가?

그들은 어떻게 그 먼 바다를 건너왔는가? 그들은 어떻게 망망한 바다에 떠서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단 말인가? 또 그들은 왜 우리 바다에 들어와서 저렇게 연기를 내뿜으며 떠 있단 말인가?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당시 갑자기 나타난 이양선은 아직 여전히 조용한 아침의 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충분히 그렇게 비쳐졌을 것이다.

사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근현대 이전의 세계에 대양을 건넌다는 일은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 인간이 바다를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주로 ‘연안항법’(연안에 가까이 붙어서 섬, 산봉우리, 등대 등의 항해물표를 관측하며 항해하는 방법)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연안항법과 함께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역 멀리까지 나아가서 교역을 수행해 나갔다. 물론 예외는 있다. 고대 동아시아에 한민족이 수행한 해상활동에서 한반도와 중국의 산동반도를 잇는 직항로 같은 경우는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서 북으로 발해만 연안을 두르는 연안항법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가능했으리라 판단된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연안항법만이 안전했다.

근대에 들어 대항해시대에 서구유럽은 대양을 넘어 아시아로 건너왔다. 사실 대륙 간 인간의 이동이 바다를 건너 이루어진 것은 그 이전 고대 때부터 있어 온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역시 드넓은 대양을 건넌 것이 아님은 지구의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둥근 공 모양의 지구를 살펴보면 대륙과 대륙 사이에 놓인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이와 같은 바다는 저위도 지방에서는 거리가 끝없이 넓지만 고위도에서는 그 땅이 극 지방을 향하여 모아진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이었을지라도 이러한 해양지리적 공간에서는 대륙 간 인간의 이동이 가능했으리라는 것은 지리학과 항해학적 식견이 부족한 일반인이라 할지라도 쉽게 유추해 낼 수가 있으리라. 고대에 북태평양 고위도에 놓인 아시아 북부와 북아메리카의 북쪽 지방 사이의 이동이라든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북아메리카의 캐나다 북동부 지방 사이에 진행되었으리라 생각되는 해상이동은 이러한 추측에 대한 예가 된다. 특히 북유럽의 노르웨이에서 배를 띄워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의 북부로 건너간 해양활동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당시 노르웨이 해항 지역에서 널리 읽혔던 문학작품은 훗날 위대한 항해자 중의 한 사람인 콜럼버스가 아무도 간 적이 없는 바다로의 ‘대항해’를 결심할 때 서쪽 바다 건너 대륙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서쪽 바다 건너 대륙이 있다는 것, 그 대륙은 바로 그들이 사는 유럽의 왼쪽에 위치한 대륙이라는 것, 이 대륙은 그들이 그토록 찾아가려는 인도와 중국이 있는 아시아 대륙이라는 것, 이 얼마나 말도 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위대한 착각인가! 그것은 허구이면서도 공상이었지만 한편으로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지구의 참 모양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열망이었으며 그것의 확인과 함께 대두될 새로운 사회에 대한 한없는 기대였다. 당시 콜럼버스의 주장처럼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아메리카와 태평양이 없다고 전제했을 때,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항해하여 인도에 가 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콜럼버스 개인이 받게 될 보상과 그를 지원한 선대의 국가가 얻게 될 혜택 외에도 ‘발견’이 안겨다 줄 인문 사회 경제적 변화는 충분히 예고되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대항해가 있기 전에 대서양의 남쪽을 향한 포르투갈의 줄기찬 항해가 있었다. 사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사람이었다. 그의 출생지가 이태리의 제노바라고 알려져 있지만, 선원으로서의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인이었다. 그는 25세에 항해 중 포르투갈 해역에서 해양사고로 배가 파손되자 해엄을 쳐 인근 리스본 연안으로 가 닿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 후 그는 대항해를 실행하기 위하여 스페인으로 넘어가기까지 줄곧 포르투갈의 바다에서 육상에서 삶을 영위했고, 결혼을 하며 자식을 갖게 되었다. 대항해에 대한 포르투갈의 야망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아직 중세이던 15세기 초부터 그들은 남방으로 아프리카 서안의 해역으로 전혀 가 본 적이 없는 바다로 배를 띄웠다. 아프리카 서쪽으로의 항해는 포르투갈에게 큰 부를 안겨 준 것은 아니지만, 바다를 건너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과 그들과의 교역에서 포르투갈은 일찍부터 국가적 비전을 찾은 것 같다. 이것은 해양에 대한 도전의식, 해양입국 이념을 키워나가게 했고 그렇게 무장된 선원들 즉, 해기인력은 항해를 하며 장사를 하며 필요시에는 전투를 하면서 아프리카 서안을 따라 끝없이 항진했는데, 교역의 결과 얻은 이윤은 물론 그에 따라 새로운 바닷길에 대한 정보와 조선술, 항해술의 발달을 가져왔지만 한편으로 배가 파손 침몰되고 승무인력이 사망하는 등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선대는 드디어 땅이 끝나고 꿈에도 그리던 동쪽으로 열린 바다를 만난다. 당시 포르투갈의 왕은 이 아프리카 최남단의 곶을 ‘희망봉’으로 명명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의문점이 남게 된다. 왜 그들은 그토록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찾았던가? 이것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이 된다. 먼저,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중간 경유지 중의 하나인 오스만터키 제국이 발흥하여 교역상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물품은 유럽의 소비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향료이다. 사실 유럽사회는 오래 전부터 동양의 물품에 대하여 근원적인 욕구가 있었다. 비단, 도자기, 차 음료를 마신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운 사치생활에 속했다. 유럽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 동양의 산물을 선호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동서간의 교역로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일기 시작했다. 육로가 어렵다면 바다로 가는 길을 찾아보자. 만약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캐러밴의 짐바리에 의존하는 물류 방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단번에 막대한 양의 짐을 가져오는 일이 가능해진다. 선박에 의한 운송, 이른바 해상실크로드에 대한 상상이다. 이외에도 유럽의 동양에 대한 갈망과 상상은 당시 그들의 종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독교의 모태가 유태교이고, 기독교도의 근원적 태생이며 생을 마치고 돌아갈 낙원도 에덴동산인데, 그것의 지리적 위치는 중동지역 어딘가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유를 든다면, 포르투갈 스페인 같은 작은 나라가 일찍부터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개척한 데에는 당시 유럽 정세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해상무역을 해야 한다는 국가 정책이 있었고, 그리고 종교적으로 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고 그 이후의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이 진행해 간 ‘대항해시대’의 대항해의 이유는 이렇게 설명된다 하더라도 거기에 참여한 해기인력인 선원들의 참여와 희생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도 해명이 어렵다. 대항해시대에 수많은 선원이 죽어갔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주도하던 16세기만 하더라도 인도항로에서는 교역을 떠나는 4척 중 1척만 돌아와도 투자자들은 성공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리 중세 유럽사회가 전쟁이 잦고, 영양공급 부족과 질병의 만연으로 평균수명이 마흔을 못 넘길 만큼 나빴다지만 그와 같은 악조건의 항해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미스터리이다. 물론 그 후로 기술의 발달과 함께 대륙을 건너는 대양항해는 인력희생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영양부족, 신선한 식수 부족, 부실한 의료조건, 안전사고, 파손, 조난, 침몰 등의 문제는 상존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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