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3
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3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8.15 18:38
  • 댓글 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85년 거문도를 점거한 영국군함. 돛과 증기기관을 겸용하는 선박으로서 거문도에 출현한 당시에는 선체중앙의 연돌에서 검은 배기가스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1885년 거문도를 점거한 영국군함. 돛과 증기기관을 겸용하는 선박으로서 거문도에 출현한 당시에는 선체중앙의 연돌에서 검은 배기가스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또는 한민족을 민족적 정체성으로 하는 동아시아 해역의 개인들에게서 해양활동이 쇠잔하게 된 것은 대략 고려 중엽 이후의 일이다. 그것은 해양국가라 할 수 있는 고려의 집권세력의 성향과 권력이동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국대륙의 해금海禁 정책의 영향이 크다. 명나라에 접어들면서 대륙은 바다의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바다의 수많은 해민海民들의 생계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바다에서 바다의 사람들이 길을 잃게 된 것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당시 한일 해역을 항해하는 상선들의 기착지이며 정치적 피난처였던 대마도와 규슈 연안 도서 일대로 옮겨갔을 것이다. 바다를 길로 삼아 교역을 하는 무리들이 길을 잃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해적질을 하게 되지 않겠는가? 사학자 김성호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 중에 상당수가 왜구가 되었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한반도는, 그 연안에서 바다를 들고 나는 이치를 아는 사람들은 먼 바다로 나아가는 일을 멈췄다. 언제부턴가 그들은 얕은 바다에서, 또는 강에서 뱃일을 일삼았다. 그들은 여전히 배를 짓고 배를 부리면서 바다에 나아갔지만 오직 뭍에 가까이 붙어서였다. 주로 섬과 섬 사이 섬과 해안 사이의 수로에 배가 다녔다. 수로에는 폭이 넓은 것도 있지만 울둘목과 같이 유속이 급한 협수로도 적지 않았다. 배들은 곡식을 실어 날랐다. 이른바 세금으로 바치는 조곡이란 것이었다. 한반도 남도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곡식은 금강 영산강 낙동강의 강운으로 이동되어 하구에서는 풍향 시기에 맞춰 선단이 출발했다. 이와 같은 조운 선단은 오직 ‘연안항해’였다. 조선시대에 조운 철이면 조곡을 적재한 선단이 남해안, 서해안의 바닷길에 줄을 이었다. 조운은 당시 한반도에서 수행된 해상운송 즉. 해운의 일종으로서 처음에는 조정에서 관할했지만 나중에는 민간의 사선이 맡아서 수행했다. 해운과 육운은 그 특성상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예나 지금이나 해운은 야간에도 수행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여 배는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도 위에서 배가 정지한다는 것은 침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운 철이면 한반도의 서, 남해안의 바닷가와 도서 지방에서는 밤이 되면 바닷길의 기점마다 불을 밝혔다. 지금의 등대 역할을 한 셈이다. 관련 지역에 현전하는 불근도, 불도, 탄도, 연도, 인화도, 화도 등의 명칭들은 당시에 바로 이와 같은 조운 활동이 왕성했음을 말해준다.

풍부한 해안선과 많은 섬이 있어서 배를 지으며 바다를 들고 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참 좋은 일 아닌가. 그들은 평시에는 어로를 하거나 해상운송인이었고, 전시에는 수군이었다. 조선 선조 때에 나라에 큰 변이 일어났다. 한반도의 바다로 열린 창, 부산항으로 상륙한 일본군은 순식간에 북진하였고 임금의 어가는 비 내리는 야밤에 백성에게 돌을 맞으며 길을 떠났다. 서글픈 일이었다. 이 시대의 무기력했던 정치 상황과 들끓는 민초들의 분노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이 일본 무인들에게 장악되었다. 다만, 여전히 살아남은 것은 바다였다. 바다는 바다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바다가 있었다. 거기에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배를 짓는 일, 배를 부리는 기술, 바다를 들고 나는 지혜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전략가가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다시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조정은 복구되었다. 다시 육상은 육상의 일에 젖고 바다는 바다의 일에 몰두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러했다. 두 차례의 외침과 큰 변란이 있었지만 집권세력에게 바다에 대한 새로운 성찰은 없었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가끔씩 확인할 수 없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곤 했다. 가끔씩 대륙으로 사신을 갔다 온 관리들이 신기한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와 같은 것들은 일본 쪽으로부터 들어오기도 했다. 이상한 나라에 대한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오갔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빨래를 하며 길쌈을 하고 산에 땔나무를 해왔으며, 비가 오고 눈이 오며 봄이 오고 가을이 갔다. 동방예의지국, 농자천하지대본, 선비의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웬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3. 증기기관

남해안의 아름다운 섬 거문도 앞바다에 어느 날 이상한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바닷가에서 사람들은 이 괴상하게 생긴 배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 고유의 한선과는 많이 달랐다. 배는 상부에 굴뚝이 달렸는데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증기기관의 배기가스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은둔의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물론, 한반도 수역에 이양선이 출몰한 것은 그 이전부터였다).

실용적으로 쓸 수 있는 증기기관이 처음으로 나온 것은 영국의 ‘뉴커먼’에 의해서였다. 그 후 글래스고대학의 수리공장의 기술자인 ‘제임스 와트’는 뉴커먼의 증기기관을 개량하여 보다 강력한 효율적인 증기기관을 만들어내었다. 유럽에서 증기기관은 처음에는 광산의 갱도에 고인 물을 퍼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는데 나중에는 공장에도 널리 사용되어 증기기관은 만능기계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유럽 산업 사회에서 이와 같은 증기기관은 사실은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이어온 과학기술 연구의 산물이었다. 물을 끓인 증기로 동력을 얻고자 하는 시도는 아주 옛날부터 있어 왔다. 유럽에서 증기의 힘으로 기계를 작동시키려는 연구는 자본주의적 열정과 환경이 갖추어져가던 17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유럽의 16, 17세기에 나라들마다(아직 국가의 형태가 완전히 갖춰지지는 않았지만) 부국강병 중상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의 장원제도와 관련이 깊다. 서양 중세 내내 많은 전쟁이 있었다. 장원과 장원끼리, 귀족과 그 가문끼리, 소영주국끼리, 대영주국들 사이에, 국가와 국가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을 담당한 사회적 계층을 기사라 불렀고, 기사는 중세사회에 중요한 계급문화를 형성해 갔다. 이러한 전쟁과 함께 사람들이 이동했고, 점령지에서 획득한 전리품이 전승국의 땅에 가져가졌고, 점령을 당한 곳에서는 점령국의 문화가 소개되었다. 전쟁은 낯선 곳의 낯선 사람에게 서로의 문화가 흘러가게 했다. 이 서로에게 낯선 문화와 그 문화에 속한 물품들이 그들의 소비욕구와 생산동기를 자극했다. 옛적 고대로부터 중세까지 동서양에 전 지구적으로 진행된 교역, 실크로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긴긴 세월 흘러들어간 동양의 비단, 도자기, 차 등의 물품들은 유럽의 소비문화와 생산에너지를 유발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한 것이다.

유럽의 경제 공동체들은 자체적인 소비문화의 발달과, 그리고 동양과의 교역과 함께 자본주의적 열정에 불을 붙이면서 상품생산에 몰입해 들어갔다. 근대에 들어선 유럽의 생산주체들은 대량생산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시아로부터 아메리카로부터 향료무역과 노예무역, 사탕수수와 면화, 은의 유입과 함께 자본주의 경제의 에너지로 활활 불붙은 유럽 경제사회에 어쩌면 증기기관과 같은 강력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기계가 발명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은 처음에는 광산의 갱도에 스며드는 물을 배수하고 갱도 안의 석탄을 바깥으로 운반하기 위하여 이용되었다. 당시에 유럽사회는 에너지 소비가 급격하게 늘어나 석탄을 채굴하기 위하여 광산의 갱도가 자꾸 깊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유럽 경제사회의 화두는 온통 증기기관이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의 관심이 증기기관의 발달과 그 이용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문명과 과학기술의 발달 이면에는 과거의 기술 계층과 그 사회의 위기의식이 있다. 여기에는 사회경제적 충돌 갈등의 문제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명 이기의 출현에 대한 사람들의 감성적 상처가 상존한다. 상당수의 과학문명 기술의 결과물들이 피조물로서의 존엄성과 자연성에 위배된다는 사실에 이견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에 대한 사례는 실생활 속에서도 잘 찾을 수 있겠는데, 문학작품으로서는 레미제라블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의 해양문학 작품 ‘바다의 노동자’에 있는 내용을 소개한다. 소설은 프랑스의 북쪽에 위치한 섬 지방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의 생활을 소재로 한 이야기로서 거기에 초기의 증기선이 항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무척 흥미롭다. 그곳의 주민들은 태고부터 지금까지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자연을 경외하며 살아왔다. 그러므로 자연의 이치에 거스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다음호에 계속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