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사군탄의 물닭
8월, 사군탄의 물닭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8.05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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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철새의 검은 깃이 자취를 감추고 하얀 깃이 난무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를 굳이 한자로 표현하면 ‘흑우거백상래(黑羽去白翔來)’가 된다. 여름이 더운 것은 자연의 섭리이겠지만 올해는 유독 더 심하다. 염천지절(焰天之節)은 사람 못지않게 숨 쉬는 모든 생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연일 더운 날씨에 할미새 방정같이 서선(犀扇=물소뿔로 만든 부채)질을 해도 용광로 같은 염천(炎天)의 화기(火氣)를 물리치기는 어렵다.

오전이지만 이미 열기에 지쳤는지 숲속의 수다쟁이 직박구리는 소리마저 감추고, 자주 나는 박새는 날갯짓을 멈추고, 부부 정 남다른 멧비둘기도 서로 떨어진 가지에 앉아 딴청을 피우기 바쁘다. 까치도 입을 벌리며 나는데 매미만큼은 제철을 만난 듯 요란하기 짝이 없다. 파랑새, 꾀꼬리는 아직도 춘정(春情)이 남았는지 창공을 날고, 숲속에서 운다.

그 정은 파랑새, 꾀꼬리만의 것은 아니다. 삼호대숲의 왜가리, 사군탄의 흰뺨검둥오리, 선암호수공원의 쇠물닭은 늦둥이를 돌보느라 하루해가 짧다. 아무튼 낮에는 매미에 혼을 빼앗기고 새벽에는 귀뚜라미 소리에 위안을 얻는, 이 모든 현상이 8월 초순의 풍경이다. 여름의 절정 8월 초순까지 물닭이 태화강에서 관찰되기는 2010년 조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물닭이 지금껏 관찰되고 곳은 사군탄(使君灘) 지역이다.

이곳은 시누이 처녀와 갓 시집온 올케가 큰물을 만나 낙안소(落雁沼)에 떨어져 떠내려갔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자연재해에 오빠는 급하고 당황한 나머지 올케부터 먼저 건져 살려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이동생은 한참 떠내려가다 그만 물속으로 잠기고 말았다. “나도 죽어 환생하면 낭군부터 섬길래요.” 이 말을 누이동생이 오빠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곳이 바로 ‘사군탄’으로 태화강 중류를 가리킨다.

‘사군(使君)은 낭군(郎君)을 섬긴다’는 말로 죽은 처녀의 주검이 멈춘 곳이다. 물닭이 한사코사군탄에서 여름을 보내는 것은 인문학적으로 볼 때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런 경우 자연과학적 접근으로 ‘길 잃은 미조(迷鳥)’라고 딱 잘라 결론을 내리기보다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소망스럽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동안 조사할 때마다 배율 높은 망원경으로 이상 여부를 살폈으나 물닭은 날기도 자맥질도 하며 먹이활동을 하며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기에 그런 생각은 더하다. 물닭은 수조류로 울산을 찾는 떼까마귀에 이어 두 번째로 숫자가 많은 우점종이다. 검정색 깃털의 몸매는 가톨릭 사제(司祭)의 의례복인 까만 수단이라도 입은 듯하다. 까만 깃털을 바탕으로 뚜렷이 돋보이는 흰 부리(白嘴)와 흰 이마(白頂)는 새하얗고 네모난 로만칼라(Roman collar=가톨릭 사제의 검은 옷에 달린 흰색 칼라)로 착각할 정도여서 망원경 없이 멀리서도 찾을 수 있다. 물닭을 한자로 ‘백골정(白骨頂)’이라 부르는 데서도 검색과 흰색이 대비를 느낄 수 있다.

그동안의 관찰에 의하면 물닭은 4월말이면 모두 떠나 태화강 어디서도 물위에 떠 있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난 5월부터 8월 현재까지 매주 3차례 총 41회나 사군탄 지역 조사에서 특이점이 발견됐다. 아직도 물닭 한 마리가 삼복더위의 상주(喪主)처럼 독립주행(獨立周行)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죽은 이의 천도의식을 지내는 백중(음력 7월 15일)을 맞이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한다. 기록은 반드시 깨어진다는 속설이 있듯, 그 기록이 올해 비로소 깨져 새로 쓰이게 됐다. 후학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물닭은 여울돌 이곳저곳을 찾아올라 고개를 돌려가며 깃 고르기에 여념이 없다가도 왜가리의 갑작스런 날갯짓에 흠칫 놀라 물위를 헤엄쳐 피하기도 한다. 때로는 무료한지 날갯짓으로 첨벙거리기도 하고 물속으로 자맥질해 한참을 헤엄쳐 다니기도 하면서 하루해를 보낸다.

사군탄에는 노란 꽃 어리연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하늘을 향해 반듯이 누워 해바라기하는 어리연을 볼 때마다 물닭과 어리연이 모두 ‘낭자의 혼’이라는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배리끝’을 찾을 때마다 필자는 시인도 아니면서 시인이 된다. 어찌하여 물닭은 반혼향(返魂香=혼을 부르는 향)으로, 어리연은 반혼화(返魂花=혼을 불러들이는 꽃)로 느껴질까 하는 망념에 쌓이는 것이다. 그 순간 귓가에는 구슬픈 해금(奚琴) 소리가 ‘배따라기’ 소리같이 들려온다. “약속해요 이 순간이 다 지나고, 다시 보게 되는 그날, 모든 걸 버리고 그대 곁에 서서, 남은 길을 가리란 걸… 하고픈 말 많지만 당신은 아실 테죠, 먼 길 돌아 만나게 되는 날 다신 놓지 말아요, 이생에…”(이선희. 인연)

오늘도 물닭은 아침이면 동으로 흐르는 태화강에서 유두(流頭·東流水頭沐浴=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감고 목욕한다) 의례를 행하고는 반혼향이 되어 낮을 기다린다. 저녁이면 노란 립스틱 짙게 바르고 밤을 맞이한다. 행여나 밤길 찾아 날아올 인연을 기다리는 노란 인도등(引導燈) 같은 반혼화가 된다. 밤낮을 지키면서 사군탄을 결코 떠날 수 없는 이유일까.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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