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군의장협의회 2대 목표는 지방분권과 종전선언”
“구군의장협의회 2대 목표는 지방분권과 종전선언”
  • 김정주
  • 승인 2018.07.31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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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봉 울산구군의장협의회 회장·중구의회 의장
신성봉 울산시 중구의회 의장.
신성봉 울산시 중구의회 의장.

 

北공훈배우 글씨 의장실에 <우리는 하나>

찾아간 날(7월 27일)은 하필 ‘정전(停戰)협정’ 6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중구 의사당 의장실 서쪽 벽면의 액자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우리는 하나>라는 한글 서예작품. ‘2002. 10. 16. 김명성’이란 글씨가 궁금했다.

“‘우리겨레 하나 되기 울산본부’ 이름 아래 평양 근교의 국수공장 일을 도와주러 갔을 때 부탁해서 받은 작품입니다. 붓글씨 주인공(‘김명성’)은 자신을 공훈배우라고 소개했고요.”

‘2002년’이라면 남북화해의 물꼬를 튼 김대중 정부의 집권 시기다. 당시 울산 지역사회도 지금과는 달리 진보, 보수를 떠나 ‘우리겨레 하나’란 간판 아래 모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때였다. 북한 공훈배우의 작품이 6·13 지방선거 직후 의장실에 걸리게 된 사실. 어쩌면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예정된 수순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선거는 평화세력 대 반(反)평화세력의 싸움이란 느낌이 들었지요. ‘바람’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시대의 흐름’의 흐름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박태완 후보(현 중구청장)가 지지율 문제로 의기소침해 있을 때도 꼭 당선된다는 말로 힘을 실어주기 했지요.”

부인은 선거운동 손사래… “평가는 당신이”

신성봉 울산 중구의회 의장(58, 중구 ‘다’선거구, 민주당). 신 의장이 지난달 12일 울산구군의장협의회 신임 회장에 추대된 것은 부의장 경험과 ‘3선’ 관록 덕분이었지 싶다. 그 과정에는 시련의 시기도 있었다. 지난해 7월 다수당(새누리당) 유력인사의 입김으로 제명처분을 당했다가 경찰 조사로 누명을 벗기도 했다. 6·13 지방선거에서 2위와의 격차를 크게 벌린 끝에 1위 당선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던 비결, 그리고 저간의 사정을 넌지시 물었다.

“말도 안 되는 누명, 그리고 제명…, 기억조차 하기 싫지만 ‘사필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압도적 승리는 주민들의 격려와 성원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정적(政敵)이기도 한 어느 유력인사의 ‘민주당 입당 타진’ 설을 공개적으로 퍼뜨렸다 해서 ‘일시제명’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선거구민들은 신뢰를 접지 않았다.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구청장 왜 안 나가나?”, “왜 시의원 안 나가나?”였다.

“왜 혼자 다니냐?”는 말도 이따금 들었다. ‘선거가 한창인데 왜 부인이 안 보이느냐’는 물음으로 들렸다.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했다. 부인 이주미 여사(52, 약사)와 아들 경원 씨(20, 현재 육군 운전병 근무)는 선거일이라면 늘 손사래를 치곤했다. “주민 평가는 당신이 받아야지, 왜 내가 나서야 해요?”, “구의원은 아빠가 하실 건데 와 내보고…”가 부인과 아들이 선거운동 동참을 거절하면서 갖다 붙이는 이유라 했다.

운동권 부부, 최근 ‘6월의 사람들’ 결성

가족들이 서로 소원해서 그런가? 잠시 그런 생각에 잠긴 사이 수신음을 감지한 신 회장이 인터뷰 중인데도 전화를 집어 든다. 투박한 목소리와 다감한 목소리가 짧게 오고갔다.

“토요일, 집에 갈까?” “알았다.”

대구 집에서 만나자는 교신이었다. 부부지간에 허물이 없다는 느낌, 양성평등이란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사실 신 회장 내외는 주말부부다. 울산 우정선경아파트 근처에서 약국을 하던 부인 이 여사는 집안 일로 고향인 대구 수성구 쪽에서 약국을 옮겨 차렸다. 보고 싶으면 서로의 사정을 저울질해서 울산과 대구를 오가며 만난다. 선거 때 신 회장이 혼자서 다니면 동네 어르신들이 으레 건네는 말이 있었다. “우리 주미, 잘 있나?”

이들 부부는 알고 보면 ‘운동권’이다. 명함은 안돌려도 선거자금은 얼마든지 대주겠다는 주미 씨는 한때 ‘건강사회를 위한 울산약사회’ 회원이었다. 고(故) 문익환 목사 초청강연 일로도 만나면서 가까워진 끝에 1995년, 마침내 부부의 연(緣)을 맺는다.

신 회장의 신앙은 천주교, 본명은 클레멘스. 하지만 부인 이 여사는 성당 대신 ‘한 번씩 절에’ 나간다. 간섭하지 않고 서로 존중할 줄 아는 사이다.

신 회장의 운동권 전력은 다채롭다. 그의 타임머신은 잠시 1987년 6월 항쟁 전후로 돌아가 있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는 말들이 마구 쏟아졌다. ‘부산 전포동 흥아타이어 근처’, ‘변호사 노무현’, ‘민주·진보청년 정대연, 김진석에다 ‘새 날 여는 청년회’도 등장했다.

“얼마 전엔 6월 항쟁 때 어깨를 나란히 했던 동지들끼리 ‘6월의 사람들’이란 모임을 만들었지요. 6월 항쟁 막바지에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모래 뿌리는 샌딩 차를 몰고 남목고개를 넘어가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신성봉 회장은 울산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고. 군대에는 ‘강제징집’으로 갔다 왔다. 그의 고향은 오영수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갯마을’의 촬영지인 부산 기장군 일광. 광복회 사령 박상진 의사에 대한 박사학위 취득을 겨냥, 2005년 중국 연변대학에 입학했으나 ‘자료 부족’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대신 8년 만에 ‘조선인 만주 이주사에 관한 연구’로 역사학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게 그의 전언.

“사람·돈 수도권 집중은 국가적 행정낭비”

민선7기 구군의장협의회는 구성됐지만 첫 회의는 아직 열지 못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지난달 27일만 해도 동구의회와 북구의회는 회기 중이어서 전원 참석이 불가능했다. (동구·북구의회는 의장도 상임위원회에 참석해야 한다.) 그러나 8월 이후론 다달이 만날 참이다.

신 회장의 복안은 이미 마련돼 있다. 목표는 크게 두 가지. ‘연방정부에 준하는 지방분권’’과 ‘한반도 전쟁상태의 종식’ 즉 ‘한반도 종전선언’을 반드시 이뤄내는 일이다. 이 시대적 소명을 위해 울산은 물론 전국의 구·군의장단과도 긴밀하게 협조할 생각이다.

그 말에 이어 안내받은 곳은 문서와 서류철로 어지러운 큼직한 타원형 원탁. 대부분 ‘지방분권’과 유관한 것들이라니 그를 ‘지방분권의 전도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일장연설(?)이 쏟아져 나왔다.

“서울과 경기도가 포함된 수도권은 전 국토의 14%에 지나지 않는데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살고 있습니다. 1천 개나 되는 대기업 본사는 물론이고 국가예산의 80%가 수도권에 몰려 있습니다. 자연히 지방은 일자리조차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사람들은 지금도 계속 빠져 나가기만 합니다. 그래도 지방 공무원들은 쥐꼬리 예산이라도 따내겠다고 중앙부처 공무원들 앞에서 굽실거리기까지 하는 세상 아닙니까? 한마디로 국가적인 행정 낭비입니다.”

그는 이대로 가다가는 읍·면·동, 구·군이 언제 사라질지도 모를 심각한 상황이며, 중앙정부가 그 막강한 권한과 재정을 지방정부로 대폭 이양할 때가 됐다고 힘주어 말했다. 스위스를 비롯해 선진국치고 지방분권이 잘 안 된 나라는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공무원도 사람”… 덤프트럭으로 출퇴근

그는 기초의회 의장으로서의 각오도 내비쳤다. 그가 한 말 가운데 가장 자주 입에 오른 용어는 ‘2중대’. 지자체 장들이 아무리 같은 당 소속이라 하더라도 ‘거수기’, ‘들러리’ 소리는 절대 듣지 않도록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한때는 기초의회 무용론이 끊임없이 나왔지만, 기초의원이란 주민들의 소중한 고유권한을 위임받은 심부름꾼들 아닙니까? 개인의 명예나 영화를 떠나서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라고 명령받은 사람들이 기초의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 회장은 민선 5기, 6기 때만 해도 ‘주민들의 삶의 질’을 위해 부단히도 뛰어 다녔다. 숱한 민원을 해결해 왔지만, 만의 하나라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라는 판단이 서면 민원인이 알아듣게 설득을 해왔고, 그러한 진지함이 무한신뢰로 이어져 오늘의 그를 있게도 했는지 모른다.

중구의회 의장 신성봉. 그에게는 남다른 구석이 있다.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가짐이고, 그러한 자세는 그에게서 ‘사람 냄새’가 나게 만든다.

“의장 당선 후에 7급 비서실장이 ‘뒤쪽으로 타시라’며 차(=의장 전용차) 문을 열어주기에 제가 그랬어요. ‘나도 손 있다’고. 그리고 ‘아주 중요한 행사가 아니면 따라오지 말아라’, ‘윗도리도 내가 들고 다니겠다’고 그랬어요.” ‘권위 내려놓기’를 선언한 것이다.

‘사람 냄새’는 그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운전비서가 ‘어디로 모시러 갈까요?’하고 물어온 적이 있습니다. 의장 전용차(제네시스)가 있지만 출퇴근할 때는 예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제가 가진 1톤 덤프트럭을 직접 몰고 다닙니다. 공무원도 사람 아닙니까? “

화제를 돌려 슬쩍 별명이 무엇인지 물었다. 싱긋이 웃으며 답했다. “별명 말이지요? 6대 때 들은 건데 ‘봉봉’이라 그럽디다. 제가 꼬마자동차처럼 귀엽게 보였겠지요. 그리고 이번 선거 때 박경흠 의원은 안 나타나는 데가 없다고 ‘신길동’(←홍길동)’이라 불렀고, 주민들깨서는 부지런하게 돌아다닌다고 그러시는지 ‘바람돌이’라고 불러 주십디다.”

글=김정주 논설실장·사진=윤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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