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장면에서 일 년이 지난 지금에 그 ‘오로지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란 정치적 수 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겨우 알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5년 동안 ‘말 귀를 못 알아먹는 국민’ 땜에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듣고, 기회 있을 때마다 TV에서 인터넷에서 교화를 받았건만 그 분이 받들 뜻을 국민이 끝내 드리지 못하고 끝났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국민을 섬기며, 찢어지고 빈털터리 넝마 가던 지갑을 채워주겠다’는 또 다른 새로운 강자를 믿고 다시 한 번 희망을 걸었었다. 늘 듣는 말 인듯하면서도 그 당시로서 생경스럽고 반가웠다. 그런데 그 국민은 어느 나라 국민이며, 섬김 또한 무엇인가. 새로운 대통령이 맡은 이 나라 일 년, 국민은 섬김을 받았는가, 지갑을 기워지고 채워지고 있는가.. 이른바 글로벌 지갑시대에 우리보다 몇 갑절이나 큰 미국사람 지갑이 저 모양이니 그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섬김, 뜻을 받드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우리 ‘섬김’의 바탕에는 자식이 부모를 받들어 모시는 효(孝)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효’(孝라)는 것은 자식(子)이 흙 묻은(土) 괭이(?)를 어깨에 메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열심히 농사지어 편안하고 배불리 모신다는 의미이다. 무릇 백성은 곧 하늘이라 했으니 의당 맞는 말이다. 이렇듯 정치인이 섬기는 정치를 하겠다는 다짐의 의미는 그 뜻이 깊고도 크다.
뜻을 받든다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듣고 새겨 그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방적 접수가 아니라 상호 주고 받음을 통하여 결말을 끌어내는 소통의 문제인 것이다. 세상이 각박하고 어려울수록 터놓고 말하고 이해를 구해야 풀리는 것이다.
국민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불쑥 전면개방의 카드를 꺼내들어 곤욕을 치렀던 ‘쇠고기 파동’이나,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대운하 건설’과 같은 대토목공사를 잊을 만하면 슬그머니 꺼내서 밀어붙이려 하는 것은 뜻을 받드는 소통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흙 묻은 괭이로 열심히 일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거칠은 괭이를 얼러 메고 위협하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며칠 전 청와대에서 있은 ‘제 1회 섬김이 대상’ 시상식 보도를 보았다. 경기 안산시를 포함한 4개 지방자치단체와 관계 공무원들에게 불합리한 규제를 적극 풀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섬겼다는 공로를 표창한 것이다. 공무원이란 그 자체로서도 봉사자 즉, 받들어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음에도 일부러 드러내 표창해야 한다는 현실이 이명박 대통령의 ‘섬기는 정치’를 무색케 한다.
진정한 섬김이란 걱정 없이 편하게 모시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전직 권력과 주변이 소용돌이 치고, 정상적인 나라살림살이 계획인 예산은 정쟁에 발목 잡혀 제 시간에 통과되지 못하고, 나라의 달러 주머니는 딸랑딸랑 바닥이 보일 듯 위태로워 가슴 졸이게 하는 것은 결코 섬기는 정치가 아니다.
힘없는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하게 만드는 정치권은 다시 한 번 ‘참 섬김’의 뜻을 되짚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