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의 폭력
형식의 폭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7.16 21: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끔 테니스 경기 중계방송을 본다. 롤랑가로스(프랑스 오픈 테니스 경기)가 끝나고 지금은 영국 윔블던 대회가 한창이다. 프랑스, 호주, 두바이를 비롯한 곳곳의 경기와 달리 윔블던 대회는 잔디 구장을 사용한다. 그 외에 특별한 규칙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하얀색 규정, 즉 하얀색 유니폼만 입고 경기에 임하라는 규칙이다. 순백색이 주는 어떤 색깔 이미지는 고급스러움, 우아함, 귀족적인 것이 복합된, 백의민족이라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색이다. 코트 위 하얀색 옷 규정만큼이나 로고의 색상 규정도 있다. 다크 그린 색은 선수를 제외한 심판관, 라인맨, 볼보이만 가능한 색상이라는 식이다.

가장 오래된 테니스 대회라는 명성과 함께 아직도 지켜지는 규정이 새삼 놀랍기도 하다. 얼마 전 이름난 선수가 소위 복장 위반으로 뉴스에 떴다. 이른바 바닥이 오렌지 빛인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운동화 바닥까지 규정 위반으로 내세우다니 조금 지나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한, 한 결혼식이 떠올랐다. 바로 영국 왕자 해리와 미국 배우 매건 마클의 결혼식이다. 그들의 결혼식이 5월이니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미국과 북한의 수뇌들이 제3국에서 만나는 따위의 굵직한 뉴스 속에서 남의 나라 왕자의 결혼식은 그리 커다란 뉴스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해리와 매건의 결혼식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 까닭은 형식에 숨은 폭력성 때문이다.

미국의 CNN 방송국은 두 사람의 결혼식 당일, 이른 아침부터 결혼식을 생중계했다. 신부가 미국 출신의 배우지만 뉴스 전문채널에서 거의 온종일 결혼식을 방송하다니 꽤 놀라웠다. 내로라하는 영국의 축하객들이 입장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신랑, 신부의 입장. 예식의 모든 진행 상황을 생중계했다. 여러 앵커, 연예 관계자, 디자이너, 기자들이 번갈아 가며 떠들썩한 잔치를 벌였다.

해리 왕자와 매건 마클의 결혼은 그 만남부터 꽤 화젯거리였다.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매건은 이혼 경력이 있는 배우이다. 이혼녀와 왕자의 인연과 결혼도 그랬지만 흑인 혼혈인 매건 마클을 왕실의 며느리로 들이는 것은 꽤 논란거리라고 들었다. 백인 아버지는 결국 여러 가지 개인적인 상황을 이유로 결혼식에 오지 않았고, 순서에 맞춰 오랜 시간 동안 예식이 진행되었다. 축가도 각각 영국과 미국 측에서, 축하 연설도 각각 이어졌다. 흑인 목사는 부흥회 하듯이 열정적인 목소리로 둘을 축하했다.

예식을 치르던 거대하고 높은 성당. 하객들과 왕족들의 자리는 철저하게 분리된 것처럼 보였다. 반세기가 넘도록 여왕의 자리를 차지한 시할머니, 재혼한 시아버지 내외, 형님 가족들과 아이들이 귀빈석을 메웠고, 결혼식에 초청된 여러 귀족, 유명인들은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결혼식을 지켜봤다. 축가를 부르는 팀이 둘이었는데 그들의 자리도 제각각 분리된 것처럼 보였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카메라는 매건을 자주 비췄다. 약간 검은 피부에 주근깨를 감추지 않은 옅은 화장,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아름다웠다. 가끔 매건 마클은 남편이 될 왕자와 눈을 마주치고 웃는 모습도 보였다.

거대한 왕실의 조직이 마련한 성대한 예식은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수백 년 이어오면서 정제된 형식은 한 개인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복잡했다. 문득 왕실의 결혼식, 그 형식의 절차를 하나하나 치러내는 과정은 매건에게 몰아치는 폭력 같았다. 형식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갓 입대한 병사를 훈련하는 방법은 형식을 몸에 배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듯이 말이다. 거대한 조직에 반항하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의식은 바로 그들이 형식을 강요하는 일이리라. 그 생각에 이르자 결혼식은 흡사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기사 작위를 주는 자리 같기도 했고, 피바람을 예고하는 대관식처럼 보였다.

허우적거리기만 해도 목숨이 날아가는 절체절명의 기로, 절대 탈출하지 못하는 절벽 감옥, 폭풍우가 몰아치는 거센 바다를 표류하는 구명보트처럼 아슬아슬했다. 미소를 띤 그녀는 그들이 제공한 모든 형식의 빈 곳을 지키는 하나의 작은 부속품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집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왕실의 매우 어렵고 복잡한 결혼 절차, 윔블던의 복장 규정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개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척하면서 그 개인을 형식의 한가운데로 내몰고, 전통이라 내세우며 개인의 자유의지를 뭉개는 규정이 사라지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또한, 더는 형식을 전파하는 왕실의 결혼식이 생중계되지 않기를 바란다.

박기눙 소설가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