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 고라니 출산 관찰기’
‘태화강 고라니 출산 관찰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6.24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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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초 검정말이 하얀 반달무늬 손톱 같은 꽃을 연신 물 밖으로 밀어내는 성하(盛夏)의 초입. 꾀꼬리는 벌써부터 나무그늘 찾기 바쁘고, 한낮 뻐꾸기는 이른 더위로 벌어지지 않는 부리 탓인지 쉰 소리조차 제대로 내질 못한다. 올해 자식농사는 헛것?

사람이든 동물이든 일정한 개체수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어야 국가 운영과 자연생태계 순환이 순조로운 법이다. ‘태화강 고라니 출산 관찰기’를 이러한 관점에서 소개한다.

지난 13일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있던 날이다. 그날따라 난생처음 고라니 출산 현장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고라니의 짝짓기 시기는 12월∼2월 사이이며, 임신기간은 180일 가량이다. 수컷과 암컷은 모두 견치(犬齒)라 부르는 송곳니가 있다. 수컷은 길게 자라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암컷은 너무 작아 눈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암컷은 송곳니가 긴 수컷을 교미 대상자로 삼는다. 송곳니가 길고 튼튼하면 건강한 수컷이므로 자손을 위한 번식 전략인 셈이다.

고라니는 새끼를 5월∼6월에 낳는다. 필자는 지난해 7월부터 매주 3회(월·수·금)씩 범서대교 아래 ‘배리끝’에서 낙안소를 거쳐 사군탄과 해연에 이르기까지 직선거리 약 1.7㎞, 면적 약 374,8㎡을 중심으로 조류 생태현상을 조사하고 있다. 사전투표는 미리 한 덕분에 투표당일에는 여유시간이 있어 다른 날보다 30분 이른 오전 8시쯤 조사현장에 도착했다. 고개를 돌려 전체를 조망한 다음 천천히 가까이서부터 멀리까지 시선을 옮겼다.

바로 그때 약 10m 앞 언덕 아래쪽 풀숲에서 작은 흔들림이 느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머리가 풀숲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어설프게 보였다. 조금 지나자 고라니가 일어섰다. 얼굴은 나이가 들어 보이고 배는 상당히 불러 있었다. 얼마 후 고라니는 일어났다 앉았다 누웠다를 자주 반복했다. 출산 행동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윽고 30분이 지났을 무렵 어미고라니는 몸부림에 가까운 행동을 보였다. 그러다가 한순간 목을 길게 빼고 고통스러워했다. 목에 굵은 힘줄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힘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음소리는 내지 않았다. 순간 작은 덩어리가 튕겨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미고라니는 잠깐의 쉴 틈도 없이 풀숲에 몸을 가린 채 한참동안이나 핥는 행동을 되풀이했다.

족히 20여분이 지났을까, 촉촉이 젖은 새끼고라니의 채머리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20여분 간격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새끼고라니는 3마리였다. 어미고라니의 불렀던 배가 홀쭉해졌다. 열흘 남짓 지난 현재 고라니 가족은 출산 현장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리를 옮겨가며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아무리 발품을 파는 필드 조류학자라지만 고라니의 출산 장면을 목격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새끼 3마리의 순산을 지켜본다는 것은 생에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기회이다. 그 기회가 필자의 몫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기쁘다. 태화강에서 고라니의 출산 현장을 목격한 관찰기가 후학들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기쁘다. 이번 일을 계기로, 고라니가 하필이면 왜 그곳을 출산 장소로 선택했는지, 추정해 보았다.

첫째, 장소의 선택이다. 두 가지 점에서 출산 경험이 있는 고라니로 짐작되었다. 그 하나는 사람의 왕래가 잦은 데크로부터 약 10m 가까운 곳이라는 점이다. 이곳은 자전거를 타거나 마라톤이나 산책을 하는 사람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어미너구리가 담비, 삵, 너구리와 같은 포식자의 접근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하나는 약 10m 전방에 농장이 있다는 점이다. 그곳에는 늙은 진돗개 한 마리가 있고 이따금씩 크게 짖기도 한다. 개의 간헐적 짖음이 담비, 삵, 너구리 같은 포식자의 접근을 미리 차단하는 점을 어미너구리가 톡톡히 활용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 담비 연구자는 담비 한 무리가 연간 고라니 9마리를 사냥하고, 전국적으로는 한 해에 고라니 1만 마리가 담비의 먹이가 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담비가 고라니의 천적이라는 얘기다.

둘째, 시간의 선택이다. 오전 8시33분쯤부터 분만을 시작해 1시간 남짓 세 마리의 새끼를 모두 순산했다. 대부분의 야생 포유류는 야행성이다. 어미고라니가 저녁시간대에 새끼를 낳았다면 삵, 너구리 같은 포식자의 공격에 노출되어 포식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새끼고라니의 출산 이후 삵, 너구리, 담비 등에 의한 역경지수(逆境指數=숱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목표를 이루는 능력)는 높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역경지수를 높게 만든 것은 어미고라니의 출산경험일 것이다. 안전한 출산장소, 아침나절의 출산, 인간 혹은 포식자의 접근을 미리 막을 수 있는 개 짖는 소리를 선택한 점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고라니는 가장 한국적인 젖먹이동물이다. 올해 태화강에서 태어난 3마리의 새끼고라니기 부디 삵과 담비의 공격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태화강의 지킴이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어제는 어미젖이 퉁퉁 불은 채 키 큰 달맞이꽃이 끝만 보일 정도의 깊은 풀숲을 찾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후 풀숲이 계속 흔들렸다. 개가 간헐적으로 짖는 소리를 경호음 삼아 지금도 느긋하게 새끼를 돌보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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