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그까짓 거-‘아이, 토냐’
인생, 그까짓 거-‘아이, 토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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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이, 토냐' 한 장면.
어차피 인생의 시작은 복불복(福不福)이라면 <아이, 토냐>에서 주인공 토냐(마고 로비)는 불운한 편에 속했다. 태어나 보니 최악의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 물론 토냐의 엄마(앨리슨 제니)는 생모였다. 하지만 어린 토냐를 향한 욕지거리와 구타는 기본이었고, 가끔은 정신병자처럼 딸이 잘 안되길 빌기도 했다. 실제로 자신의 폭력으로 집을 떠난 사춘기의 딸을 저주하기 위해 토냐가 출전하는 경기장에서 사람을 매수해 대신 야유를 퍼붓도록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어린 토냐에게 피겨 스케이팅을 시켰다는 것. 사는 게 구질구질하고 엉망진창이었어도 스케이트를 탈 수 있어 토냐도 견딜 만 했다.

아니, 토냐는 사실 피겨 스케이팅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나중에 그녀는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트리플 악셀(공중에서 세 바퀴 반을 도는 것)’을 성공시키며 동계올림픽 국가대표까지 된다. 이쯤 되면 감을 잡았을 같은데. 그렇다. 극 중 토냐의 풀네임은 ‘토냐 하딩’. 실존하는 미국 전직 피겨 스케이팅 선수였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라이벌이었던 ‘낸시 캐리건’ 폭행사건에 연루되면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장본인이다. 그러니까 <아이, 토냐>는 토냐 하딩의 인생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 영화는 그녀와 그녀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최대한 사실적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속에서 토냐(마고 로비)가 말한다. “세상은 언제나 ‘사랑할 사람’과 ‘미워할 사람’이 함께 필요하다”고. 토냐는 후자 쪽이었다. 엄격한 청교도 문화의 미국에서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늘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하긴 자신을 낳아준 엄마조차 그랬으니. 사랑받고 싶었던 토냐는 그 결핍을 이겨내기 위해 이른 나이에 제프(세바스찬 스탠)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제프 역시 토냐에게 사랑한다는 이유로 폭력을 마구 행사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에겐 여전히 피겨 스케이트가 있었으니.

인생은 수동(受動)에 더 가깝다. 태어나는 것부터 어떻게 자라날 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건 잘 없다. 고작 해야 자장면이나 짬뽕, 혹은 볶음밥을 놓고 선택하는 정도? 행복은 언제나 그 때 뿐이고, 태어난 후 어떻게 자라날 지는 전적으로 원하지도 않는 고통들이 결정한다. 특히 타인이 주는 고통은 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 때문에 가끔은 세상이 백지 상태로 존재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만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세상. 하지만 인형들만 존재하는 세상은 또 외로울 수밖에 없다.

어차피 답도 없고, 해서 인생은 그냥 좋아하는 것, 혹은 사랑하는 것 하나 정도만 있어도 그럭저럭 살만하다. 토냐에겐 그게 피겨 스케이트였지만 그것조차 ‘미워할 사람’까지 필요했던 세상은 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토냐는 그저 열심히 해서 사랑받고 싶었던 것 뿐인데. 지금 당신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진짜 잔인한 건 지금도 세상은 낸시 캐리건 폭행사건에 토냐가 어느 정도나 가담했는지 밖에 관심이 없다는 것. 그런 세상을 향해 토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모두에겐 자신만의 진실이 있고, 삶은 언제나 제 멋대로 흘러갈 뿐이죠. 그게 나의 인생이야기예요. 또 그게 빌어먹을 진실이죠.”

세상의 폭력으로 스케이트까지 빼앗긴 토냐는 먹고 살기 위해 복싱 선수가 된다. 실컷 얻어터져 링에서 피를 토한 뒤 뻗지만 그녀는 웃는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그녀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래. 인생, 그까짓 거. 끝까지 한 번 살아봐 주지.’ 올해로 마흔 여덟의 토냐 하딩은 지금은 페인트칠을 하고 있고, 7살의 아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좋은 엄마로서.

2018년 3월 8일 개봉. 러닝타임 120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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