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살겠다, 갈아보자!”
“못 살겠다, 갈아보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6.03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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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대 선거사상 최대의 히트작 선거구호는? 이 분야 전문가들이 주저 없이 들이미는 것이 있다. 제3대 대통령선거(1956년 5월 15일 실시) 때 등장한 “못 살겠다, 갈아보자!”가 그것. 당시 이승만-이기붕을 정·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내세운 자유당에 맞서 신익희-장 면을 대항마 카드로 꺼내든 민주당 쪽의 선거구호가 바로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다.

폭발력이 가히 ‘국민구호’급으로 돌변하자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즉시 맞불을 놓았다. “갈아봤자 별 수 있나”, “갈아봤자 더 못 산다”(-애국청년),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도 이때 명함을 내민 선거구호들이었다.

“우리의 총재, 반공(反共)의 상징, 민족의 태양 리승만을 우리의 대통령으로!(-참전전우회 서울시OO)” 당시 ‘기호 Ⅲ번 리승만 대통령 후보’의 선거벽보에 올랐던 글이다. 또 다른 벽보에는 ‘자유당-전국애국사회단체 공천’이란 수식어가 앞에 붙었다. 격세지감이 생기지만 ‘기호 Ⅱ번 리기붕 선생(부통령 후보)’의 벽보에는 “국부(國父) 리박사(李博士)가 지명하신 민주국민의 벗”이란 수식어가 들어갔다.

선거구호 속에는 당시의 시대상, 사회상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때론 국민적 희망과 염원이 투영되기도 한다. 필자가 어렸을 무렵, 입소문으로 전해 들었던 민의원(국회의원) 선거구호들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갑부였던 김지태(‘정수장학회’ 전신 ‘부일장학회’ 설립자, 전 부산일보 사장), 술도가(양조장) 사장이었던 하원준, 독립운동가 출신 진보정치인이었던 임갑수(제7대 국회의원, 신민당) 씨가 1960년대 초반(?), 부산의 같은 선거구에서 자웅을 겨루던 때의 구전(口傳)구호들 말이다. “묵고(=먹고) 보자 김지태”, “술내(=술 냄새) 난다 하원준”, “주지-넓다 입갑수”….

여기서 ‘주지-넓다’는 ‘주제넘다(=제 분수에 넘게 건방지다)’의 부산 사투리였던 것으로 짐작한다. 그 무렵, 금품선거라도 못하는 이는 ‘뻔뻔스러운 자’ 취급을 받았고, 살림형편이 말이 아니었던 임 씨로서는 귀를 닫고 못 들은 척해야만 했었다.

해는 그로부터 수십 바퀴를 돌고 돌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다. 6·13 선거일 D-22일이자 부처님 오신 날인 지난달 22일, 대전·충남발 흥미로운 기사 한 건을 뉴스1 기자가 띄웠다. 간추리면 이랬다. “6·13 지방선거를 20여일 앞두고 3선에 도전하는 자유한국당 이완섭 서산시장 예비후보의 선거구호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4년 전 기호 1번이었던 이 후보 측은 이번에 바뀐 기호 2번을 쉽게 알리기 위해 ‘2번에는 2번 2완섭’을 내세워 유권자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이 고민이 이 후보만의 것일까? 울산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울산◇◇◇ 2번에도 □□□”가 대표적인 구호.

1번 후보들은 이른바 ‘촛불혁명’ 때 시위현장을 뒤덮었던 구호 ‘이게 나라냐?’에서 힌트를 얻어 ‘나라다운 나라, 튼튼한 지방정부’란 구호를 즐겨 사용한다. 단체장 후보들은 당을 떠나 “힘내라!” “뛰어라!” “커져라!”, 혹은 “바꾸자!” “바꿉시다!” “바꾸면 바뀝니다”, 또는 “함께 갑시다!” “99% 서민편”이란 식의 구호를 전진 배치해 놓고 있다. 교육감 후보들도 개성미 넘치는 구호로 승부수를 띄운다. “젊어서 좋다! 깨끗해서 더 좋다!” “교실을 바꾸는 첫 교육감” “민주진보 교육감-평화, 새로운 시작”, “깨끗한·따뜻한·세계적인 교육감” “합리적인 진보교육감” “미래희망 울산교육” “미래혁신 창조교육”에다 “청렴제일”까지 등장시킨다.

그러나 유권자 취향의 변화 탓일까. 어느 호사가는 역대 선거구호들을 한데 모아 ‘선거 슬로건 808선’을 내놓기도 했지만 “못 살겠다, 갈아보자!”와 같은 전율을 느낄 만한 구호는 아직 접하지를 못했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던가!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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