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헝거, 그레이트 헝거, 혁명-‘버닝’
리틀 헝거, 그레이트 헝거, 혁명-‘버닝’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5.3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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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은 도입부에서 해미(전종서)가 종수(유아인)에게 하는 ‘아프리카’ 이야기에 가장 주목해야 한다.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자란 해미와 종수는 십 수 년 만에 우연히 동대문 시장에서 만나 같이 술을 한 잔 하고 있다. 해미는 지금 나레이터 모델이고, 종수는 의류도매 아르바이트를 뛰고 있다. 그런데 아프리카 여행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는 해미는 종수에게 뜬금없이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소수 인종 ‘부시맨’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가난한 부시맨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바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가 그것. 리틀 헝거가 육체적으로 배가 고픈 사람을 말한다면 그레이트 헝거는 정신적으로 배가 고픈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목말라 있는 이다. 물론 해미도 후자인 그레이트 헝거이길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건 종수도 마찬가지. 작가가 되고 싶지만 종수 역시 지금 리틀 헝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날 벤(스티븐 연)이라는 그레이트 헝거가 나타난다. 해미가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만난 벤은 전형적인 금수저로 고급 포르쉐를 타고 해외여행도 언제든 갈 수 있다. 원하는 여자도 쉽게 가질 수 있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한 차례의 섹스로 종수와 썸을 탔던 해미도 아프리카에서 벤을 만난 뒤엔 그의 여자가 된다. 얼마 후 해미는 실종되고, 한 번의 섹스로 해미를 사랑하게 된 종수는 벤과 관련된 해미의 행적들을 뒤쫓는다.

성인군자를 제외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다들 비슷하다. 쾌락이라 쓰고는 사랑, 혹은 행복이라 읽는다. 다소 저급하게 들리는 쾌락이 리틀 헝거와 가깝다면 그레이트 헝거는 쾌락 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레이트 헝거도 인간인 이상 쾌락에서 벗어나긴 어려운 만큼 굳이 따지자면 쾌락의 모습이 조금 다를 순 있겠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여자를 쉽게 가질 수 있는 벤의 쾌락은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 고급 빌라에 사는 벤에게 그 비닐하우스란 게 해미처럼 버려진 흑수저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벤을 만난 후 해미는 사라져 버렸고, 벤은 이제 해미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여자를 만난다.

반면 종수의 쾌락은 아직 원초적이다. 한 번의 섹스로 해미에게 빠져버린 종수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부탁했던 고양이를 돌보기 위해 해미 집에 가서는 그녀의 체취를 느끼며 몇 차례 자위행위를 한다. 그런 뒤 귀국한 해미가 벤의 여자가 되자 벤을 향해 “해미를 사랑한다”고 울부짖듯 말한다. 물론 사랑은 쾌락이기도 하지만 이 장면이 사실 리틀 헝거들에게는 가장 비참한 장면이다. 갖지 못한 자들은 온 마음을 다 줘야 얻을 수 있는 쾌락을 가진 자들은 넘쳐서 갖다버리니. 사랑도 가끔은 자본주의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에서 조커(히스 레저)는 말했다. “모든 건 불에 탄다(Burning)”고. 벤이 쾌락을 위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면 종수는 분노를 무기로 가진 자들과 그들이 가진 것을 모조리 태워버릴 수 있다. 사실 평범한 인간들에게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는 선택이 아닌 순서일 뿐이다. 그러니까 리틀 헝거에서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그레이트 헝거로 승격된다. 누구든 배가 부르면 고상한 척 다른 삶의 의미를 찾기 마련. 그렇게 돈만 많으면 쉽게 그레이트 헝거가 될 수 있다. 또 돈이 많을 수 있는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 생각보다 훨씬 크다. 굳이 말하자면 세 명의 남녀를 통해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을 담아낸 것. 그래서 종수의 마지막 선택은 지배계급으로서는 쿠데타, 피지배계급으로서는 일종의 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도 아마 그렇게 일어나지 않았을까. 갖지 못한 자들에게 폭력은 가끔 선(善)이 되기도 한다.

2018년 5월 17일 개봉. 러닝타임 148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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