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신비’-‘라이프 오브 파이’
삶이라는 ‘신비’-‘라이프 오브 파이’
  • 이상길 기자
  • 승인 2018.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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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한 장면.

사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던지는 가장 핵심적인 삶의 명제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하던 파이(수리즈 샤르마)의 가족은 캐나다 이민을 위해 동물들을 배에 실고 항해에 나섰다가 거센 폭풍우를 만나 조난을 당하게 된다. 침몰하는 배에서 혼자 살아남은 파이는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올라타지만 그곳엔 이미 하이에나와 다리를 다친 얼룩말이 타 있었다. 잠시 뒤엔 바나나 꾸러미에 의지해 표류하던 오랑우탄까지 파이의 도움으로 구명보트에 탑승하게 된다. 하지만 ‘오렌지 주스’라는 이름의 그 오랑우탄은 몹쓸 하이에나의 공격으로 곧 죽게 되고, 얼룩말까지 굶주린 하이에나의 공격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 순간 보트 한 켠의 식량보관소에 몰래 숨어 있던 호랑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하이에나를 죽여 버린다. 그 호랑이의 이름은 ‘리차드 파커’였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구명보트에서는 이제부터 파이와 호랑이의 위험천만한 생존 동거가 시작된다. 이후 파이는 리차드 파커와의 공생을 위해 그를 길들이기로 결심한다. 이어지는 긴장 속에서 둘은 폭풍우를 만나 죽을 뻔했다 함께 살아남은 뒤 겨우 친구가 된다.

파이는 결국 리차드 파커와 227일간의 표류 끝에 살아남는다. 하지만 폭풍우로 침몰한 선박의 회사 직원들은 파이의 이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바나나 꾸러미는 물에 결코 뜰 수 없다면서. 그들은 이후 파이가 들려준 ‘신비의 섬’도 믿지 않았다. 친구가 된 파이와 리차드 파커는 굶주림 끝에 한 무인도에 도착한다. 여자가 누워있는 듯한 모양의 그 섬은 누가 들어도 비현실적이었던 것. 그러자 파이는 이번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얼룩말은 침몰 전 배 안에서 만난 친절한 선원이었고, 하이에나는 괴팍한 성격의 주방장이었다고. 또 오랑우탄은 자신의 엄마였는데 주방장이 언쟁 끝에 엄마를 해치자 분노한 자신이 주방장을 죽여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호랑이는 바로 분노의 화신이 된 자신을 의미한다.

그제야 그들은 믿었고, 파이는 나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려는 작가에게도 두 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다 들려준 뒤 “어느 것을 믿고 싶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건 지금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또 그게 서두에서 밝힌 가장 핵심적인 삶의 명제이다. 자. 그럼 당신은 파이의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것을 믿고 싶은가?

물론 선택은 자유다. 하지만 만약 선박 회사 직원들처럼 후자를 믿는다면 이제부터 내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봐야 할 거다.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 함께 표류했다는 것과 여자 모양의 무인도라니. 둘 다 분명 비현실적이지만 우리가 떠 있을 수 있는 이 우주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다. 우주가 끝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끝이 있다면 그 밖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현실이라 여기는 게 사실은 더 비현실적일 수 있다. 그렇게 <라이프 오브 파이>는 망망대해에서 펼쳐지는 파이의 표류기를 통해 ‘삶의 신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드넓은 바다는 바로 우주고, 파이가 몸을 실은 구명보트는 곧 우리들 삶인 셈이다. 영화 속에서 바다와 우주가 자주 오버랩 되는 것도 그런 이유. 사실 구명보트 같지 않은 삶이 어디 있나. 다들 외롭고 힘들다. 도움 없이는 살기 어렵다.

그랬거나 말거나 삶은 여전히 신비롭다. 그래서 역설적이다. 227일 동안 죽음이 늘 파이 곁에 있었지만 그 때도 세상은 아름답기만 했다. 또 망망대해에서는 양동이나 칼, 연필 따위가 감히 신(神)이 될 수도 있었다. 파이도 나중에 말하지만 리차드 파커가 함께 있어 긴장했고, 그를 돌보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면서 결국 살아낼 수 있었다. 뭐든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삶 앞에서 파이는 결국 삶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삶이란 그런 거죠. 그냥 무언가를 끊임없이 흘려보내는 것. 그래서 가장 가슴 아픈 건 작별인사를 못하는 게 아닐까요.”

2018년 4월 12일 재개봉. 러닝타임 127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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