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의 봄, 그리고 몇 가지 기억
80년의 봄, 그리고 몇 가지 기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5.20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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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대한민국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해로 기억된다. 그보다 1년 전 ‘12·12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의 눈에는 살기가 뻗쳐 있었고, ‘조금이라도 삐딱하면’ 계엄의 군홧발에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요샛말로 ‘언론적폐 청산’을 구호로 내건 신군부의 서슬 퍼런 ‘언론통폐합(=一道一社) 정책’은 지레 겁부터 먹은 전국 언론사 사주들이 앞 다투어 자물통을 걸어 채우는 진풍경도 연출시키고 있었다. 부산MBC-TV와 국제신문 둘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던 럭키그룹 K사장이 양자택일의 강요에 못 이겨 신문사를 포기한 것도 그런 흐름의 하나였다.

1980년의 봄! 그 해 ‘민주화의 봄’은 너무도 짧고 유별나게 소란스러운 계절이었다. 강원도 ‘사북탄광사태’(=1980.4.21∼24, 동원탄좌 사북탄광 광부들이 일으킨 노동항쟁), 동국제강 부산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시위(80.4.28∼5.5), 부산 연합철강 노동자들의 전면파업(80.5.13∼16)이 짧지만 강한 연쇄폭발음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낸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 박정희 장군의 눈에 ‘미운 털’로 박혀있던 강석진 부산 동명목재 사장의 별장에 강도가 침입한 사건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필자는 부산 남부경찰서 관내에서 일어난 굵직굵직한 사태와 사건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고, 그 기억은 아직도 광(光)이 그려진 화투장처럼 생생하다.

그 해 5월 17일 신군부가 전국에 계엄령을 발령한 이후부터 영도대교 가까이에 있던 부산시 청사에도 계엄군의 군홧발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부산지역 양대 신문사(국제신문·부산일보) 기자들은 순번제로 돌아가며 활자화된 석간신문 대장을 들고 정보담당 계엄군 장교를 찾아가 눈치부터 살펴야 했다. 기사 사전검열 제도를 감히 거스를 수 없었던 탓이었다. ‘타고난 신문기자’ 조갑제(당시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가 이른바 ‘5·18 광주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신병치료를 핑계로 광주로 숨어든 것은 사태 발발 직후의 일이었다.

신문사 몇 해 선배인 조 기자가 광주의 심장부에서 취재해서 기사용지에 깨알같이 적은 현장감 넘치는 기사가 부산 본사에 도착하기까지에는 군사작전 이상의 용기와 지혜와 끈기가 필요했다. 뒤늦게 현장으로 잠입한 사진기자가 건네받은 조 기자의 기사는 전남-경남의 도계(道界)를 지키는 계엄군의 검문검색을 무사히 피해야만 본사 도착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기사가 며칠 늦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사진기자가 공들여 찍은 사진을 계엄군에게 무더기로 빼앗기는 것 또한 다반사였다.

하루는 운 좋게도, 조 기자가 광주 현지에서 직접 작성했다가 숨겨서 보낸 기사를 훔쳐볼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놀랍게도 조 기자의 기사에는 ‘광주시민군’이란 표현이 여러 차례 들어가 있었다. 시민군의 입장에서 쓰였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런 짐작이 들게 만든 이는 당시 사회부장 J씨(전 D대 교수)였다. J부장은 조 기자의 기사를 보는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내 기사용지를 박박 찢더니 곧바로 휴지통에 집어넣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겁 없이”라는 말과 함께….

다시 5월이 찾아왔지만 5월은 필자에게 더 이상 마음 편한 ‘가정의 달’은 아니다. 38년 전 1980년 5월 그 무렵 사회부 기자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퍼덕거리는 생선처럼 눈앞에 아른거리는 탓이리라. 그로부터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8월 15일, 선후배 기자들은 사직서 한 장씩을 받아들었다. “일신상의 이유”라는 표현을 영문도 모르고 적어냈다. 그러나 사직서를 쓰는 현장에 병가(病暇)를 내고 광주로 달려갔던 조갑제 기자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2∼3개월 전, 사직서를 제일 먼저 쓰고 나갔다는 말은, 뒤늦게야 들은 말이었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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