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새와 어미 새-‘레이디 버드’’
아기 새와 어미 새-‘레이디 버드’’
  • 이상길 기자
  • 승인 2018.05.1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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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이디 버드' 한 장면.

아기 새는 모른다. 지금 있는 둥지의 높이를. 아기 새가 지금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해봐야 높고 푸른 하늘과 가끔씩 먹이를 물고 오는 어미 새의 모습 뿐. 둥지 밑은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날갯죽지가 아직 가녀린 지금, 둥지 아래는 잔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지만 떨어져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그걸 아는 어미 새는 아기 새의 행동거지에 사사건건 간섭을 하지만 아기 새는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한다.

아기 새는 어미 새가 어떻게 먹이를 가져다주는 지도 모른다. 먹이 달라고 아우성치는 새끼들 앞에 비행은 더 이상 낭만이 될 수 없었고, 창공은 이미 전쟁터였다. 겨우 잡은 벌레를 물고 둥지에 도착할 때쯤 그는 늘 녹초가 되지만 “더 달라”는 새끼들의 아우성에 다시 둥지를 떠나야 했다. 허나 그걸 알 길이 없는 아기 새는 날갯죽지가 점점 여물어갈수록 드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만 자신을 가득 채워 간다. 급기야 초라한 둥지를 탓하며 어미 새처럼은 결코 살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레이디 버드>에서 주인공 크리스틴(시얼샤 로넌)도 아직은 아기 새였다. 고등학교 졸업반인 크리스틴은 이제 막 둥지를 떠나기 직전. 둥지를 벗어나 멀리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붙인 그녀는 서부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를 떠나 동부 뉴욕으로 가는 게 소원이다.

하지만 크리스틴의 둥지는 초라했다. 가뜩이나 넉넉지 못한 형편에 아빠(트레이시 레츠)는 감원으로 막 퇴직을 해 간호조무사인 엄마(로리 맷칼프)의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랬거나 말거나 그녀는 크리스틴이 아닌 우아하고 소중한 ‘레이디 버드’였고, 자신의 삶만큼은 특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랑도, 결혼도, 행복도.

허나 엄마는 사사건건 간섭하고 잔소리만 일삼았다. 무엇보다 분수에 맞게 살라는 게 제일 싫었다. 먼 동부 대학으로 진학하겠다는 딸에게 엄마라는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고작 “주제를 알아라”는 것. 이제 레이디버드에게 새크라멘토는 고향도, 뭣도 아니었다. 그렇게 첫 비행을 앞둔 아기 새는 새크라멘토 따윈 아예 잊을 거라 생각하고, 어미 새 몰래 둥지를 떠날 채비를 한다.

어른은 아이를 이해하지만 아이는 어른을 이해 못할 때가 많다. 경험 탓이다. 아이는 모른다. 온탕에 들어간 어른들이 왜 “시원하다”고 말을 하는지. 마침내 자신도 어른이 되어 온탕에 몸을 담궜을 때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시원하다”는 말이 터져 나온 뒤에야 알게 된다. 뜨거운 물이 왜 시원한지. 그 따뜻함이 위로가 되어 차갑기만 한 세상살이에 지쳐 답답한 가슴이 조금이나마 시원해짐을 그제야 깨닫게 된다.

레이디 버드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둥지를 떠나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특별할 것만 같았던 첫사랑이 허무하게 부서진 뒤부터는 아기 새도 서서히 깨달아간다. 드넓은 세상엔 어쩌면 상처가 더 많을 지도 모른다고. 마침내 둥지를 떠나 먼 동부로 오게 된 레이디 버드는 이름을 묻는 친구에게 비로소 ‘크리스틴’이라고 대답한 뒤, 조금씩 망가져 간다. 그리고는 어미 새를 서서히 이해해간다. 행여나 그때 둥지에서 떨어 질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 지, 또 초라한 둥지가 미안해서 그런 심한 말을 했다는 것도 이제야 알 것 같다. 거칠기만 할 뿐, 그 때 그 특별했던 둥지보다 훨씬 보잘 것 없는 세상 앞에서 이제 아기 새는 소원한다. 어미 새처럼만 살게 해 달라고.

2018년 4월 4일 개봉. 러닝타임 94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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