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꿈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5.1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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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언니가 나왔다. 언니는 꿈 내내 침묵했다. 대신 나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현실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평소에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삼킨 말들이 쉼 없이 나오고 또 나왔다. 그때 왜 나한테 그렇게 했는지, 그랬을 때 내 심정은 어떠했으며, 다시는 나한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까닭까지 실컷 내 속내를 드러내고 울부짖듯 소리쳤다. 그동안 꾹꾹 눌렀던 감정을 폭발시키느라 꽤 용을 쓴 듯 잠에서 깼는데도 한동안 멍한 상태였다. 잠시 후 몸을 추스르고 사전을 찾는다.

꿈. 명사. 잠자는 동안에 생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는 일. 실현하고 싶은 바람이나 이상. 공상적인 바람. 즐거운 환경에 젖어 각박한 현실을 잊음. 「꿈도 꾸기 전에 해몽」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가지고 미리부터 제멋대로 상상하고 기대한다는 말. 「꿈보다 해몽」은 실지 일어난 일보다도 그 해석을 잘함. 「꿈에 본 돈이다」는 아무리 좋아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뜻이며, 「꿈에 서방 맞은 격」은 제 욕심에 차지 못함을 일컫고, 분명하지 못한 존재를 말하고, 「꿈을 꾸어야 임을 만나지」라는 풀이말은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음의 비유. 주로 명령형으로 쓰는 관용구인 ‘꿈 깨다’는 헛된 망상을 버린다는 뜻이고, 또 다른 관용구인 ‘꿈도 못 꾼다’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다는 뜻이며, ‘꿈에도 없다’는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다는 뜻이다. 역시 사전을 찾길 잘했다. 모호하고 애매한 뜻을 한 쾌에 정리하는 일은 사전만 한 게 없으니 말이다.

시간과 공간을 마구 넘나드는 꿈이라도 꾸는 날이면 묘하게 기분이 좋다. 또한,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이가 나오면 아련함에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곤 한다. 마치 예언이라도 되는 양 꿈에 나온 사건이나 내용, 인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짐작해 보기도 한다. 가끔 꿈 풀이를 검색하기도 하는데 다양한 꿈 풀이 중에 되도록이면 긍정적인 풀이, 즉 내 입맛에 맞는 풀이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생생한 꿈을 꾼 날이면 꿈이 어떤 암시를 준 것만 같아 꿈 내용을 곱씹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금세 잊고 아침을 맞이한다.

스펙터클한 영화 같은 꿈, 소설로 쓰기에 알맞을 만한 스토리와 인물이 나오는 꿈을 꾸면 일어나자마자 적어놓기도 하는데 다시 읽어보면 그런 횡설수설이 없다. 앞뒤가 맞지 않거나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범위가 넓고 모호한 꿈일수록 더 그렇다. 문장을 고치면 꿈의 맥락이 무너지고 말아 꿈을 적는 일에 글쓰기 법칙은 무용지물이다. 금세 무의식속으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무조건 생각나는 장면을 묘사하듯 적어야 한다. 이렇게 적어놓은 메모가 꽤 많다. 가끔 꺼내 읽기도 하는데 도무지 상황과 내용이 연결되지 않음에도 생동감은 커 기분전환에는 제격이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일이 꿈이 되어 나타나는 일이 종종 생긴다. 타인에게 하고픈 말을 참는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상황이 여러 번 되풀이된다거나 하면 한풀이를 하듯 꿈에 나온다. 언젠가 다른 이에게 나만의 꿈꾸는 방식(?)을 이야기했더니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누구는 행동으로, 누구는 글로, 누구는 그림으로 할 말을 대신하지만,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것이야말로 보편적인 의사 표현 방식이 아니던가. 꿈속에서 나는 이른바 슈퍼 갑이다. 목소리를 높이고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한다. 이런 경우 왠지 매우 후련하다. 이래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갑질을 하는 것일까?

지나간 꿈이 허망하고 씁쓸하기만 하다. 하긴 세상사 무슨 일이든 호불호가 생기고 잣대를 들이대지 않아도 될 일이 무엇이던가. 꿈속에서나마 실컷 할 말을 하는 이가 많은 세상은 그다지 바람직한 세상은 아닐 터. 더는 목소리를 높이는 꿈을 꾸고 싶지 않다. 대신 그리운 이들이 잔뜩 나오면 좋겠다. 꿈꾸기에 더할 나위 없는 그윽한 봄밤이다.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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