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우스’의 뼈아픈 교훈
‘마나우스’의 뼈아픈 교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5.16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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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아마존강 상류의 열대밀림 한복판에 마나우스라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16 00년대부터 아마존의 거점도시로 개발되었고, 아마존강 하구에서 약 1천500km 떨어져 있어 1900년대 초까지도 배 아니면 드나들 수 없을 만큼 오지 중 오지였다. 이런 도시가 1800년대 후반에는 세계적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 이 도시의 풍요와 향락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파리의 오페라 극장이나 밀라노의 라스칼라 극장을 본떠서 더 크고 화려한 오페라 극장을 지었는데, 유럽에서 직수입한 대리석과 크리스털 등의 자재를 사용하고, 난간은 황금으로 금박을 입혔을 정도로 화려했다. 이 극장에서는 매일 밤마다 유럽 최고의 배우와 가수가 공연을 펼쳤다. 또한 전 세계 다이아몬드 소비량의 10%가 아마존 밀림 한복판에 있는 오지도시 마나우스에서 소비되었다. 마나우스의 멋쟁이 아가씨나 귀부인들은 이빨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장식하는 게 유행이었을 정도다.

마나우스의 모든 부와 사치의 근원은 고무나무였다. 요즘은 동남아를 비롯해 전 세계로 퍼진 수종이지만 19세기 후반까지는 마나우스 주변 아마존 밀림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식물이었다. 고무나무에서 채취한 수액(라텍스)은 처음에는 그다지 사용처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39년 ‘굿이어’가 고무가 딱딱하게 경화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1888년 ‘던롭’이 천연고무를 재료로 자동차바퀴로 쓸 수 있는 공기타이어를 만들면서 고무는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산업 발달에 힘입어 브라질의 주요 수출 품목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자동차산업의 급성장으로 19세기 초반 몇 톤 되지 않던 천연고무의 수출량이 1912년에는 거의 만 배로 증가한 4만2천 톤에 이르렀다. 마나우스는 상류에서 배로 운반한 천연고무를 팔아 벌어들인 돈으로 활기가 넘쳤고 인구가 급증했다. 1865년 5천 명에 불과하던 마나우스의 인구가 19세기 말에는 5만 명으로 10배나 증가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고무를 사러 이곳에 몰려든 덕분이다. 고무나무는 브라질 정부도 매우 중요시해 브라질 수출에서 고무가 차지하는 비중은 1890년 10%에서 1910년경에는 40%를 차지했다.

천연고무로 인한 막대한 부가 이 도시로 몰려들 당시 고무나무나 그 종자를 반출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적발되면 중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영국인 헨리 위크햄경이 몰래 고무나무 종자를 빼돌려 영국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아프리카 등 아마존 열대우림과 비슷한 환경을 가진 나라에서 집단재배에 성공함으로써 마나우스의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마나우스의 역사를 돌아보니 울산이 거울처럼 투영된다. 대한민국 산업수도라고 자타가 인정한 우리 울산은 국내 1인당 GDP가 2만 불일 때 4만 불이나 될 만큼 타 지역보다 풍요로워 밤마다 유흥업소는 불야성을 이루고 방학 때면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몰려드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조선업 불경기에 실업자가 급등하고 자동차산업도 좀처럼 활기를 못 찾고 있다. 최근에는 인구도 줄고 신규투자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산업수도라는 자부심이 무색할 정도다.

마나우스의 패착은 자아도취와 안이한 대책이었다. 울산도 과거와 현재에 안주하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상하고 미래 신산업을 육성하며 여러 주력산업을 융복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울산을 이끌었던 대기업의 귀족노조가 지금처럼 군림하는 한, 울산이 마나우스처럼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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