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문화 맛보기 ② 차 맛을 읽다
茶문화 맛보기 ② 차 맛을 읽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5.0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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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 한 잔은 일상의 덧문을 닫으며 안식처같이 스며든다.

차는 이제 우리 생활에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 중 티백과 캔 제품, 다양한 차 음료가 봇물을 이루는 지금 우리 민족의 차 문화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차를 음용했다는 설이 있다. 3세기 고구려 벽화에서는 차 생활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828년)에 중국차가 전래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가져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이처럼 차는 이미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였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 차를 마시는 풍습은 선덕여왕(632~646년) 때부터 있었지만 차를 최초로 심고 재배한 이는 대렴이었다.

조선시대의 차 문화는 다소 위축되어 주로 궁중이나 민간의 약용으로 쓰였다. 그 맥은 사찰의 승려들이 이어오다가 다산, 초의, 추사와 같은 걸출한 다인들이 나타나면서 차 문화는 다시 중흥의 시기를 맞는다.

조선 중기에는 이어져 오던 조선의 차 문화가 사대부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면서 저변이 확대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선비들은 차 한 잔이 취미생활처럼 즐거움이었고, 차는 여행길의 동반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마음이 울적하고 외로울 때는 술 대신 심신을 달래주는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다.

또한 좋은 경치를 보며 마시는 차 한 잔은 그 시대의 문인과 화가를 탄생시키는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 인물들 가운데는 이황, 이이, 이순신, 허난설헌, 허균과 같이 우리가 아는 분들도 있지만 조선 후기에는 茶人으로 거론되지 않은 인물들이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내친김에 허균의 차시(茶詩) 한 편을 소개해 본다.

<해양에서 감회를 기록하다 (海陽記懷)>

작은 정원 회랑에 날 이미 저물었으니

은 사발에 막 끓는 물로 햇차 맛을 보세.

연못에 잠긴 연꽃은 연잎을 띄우려하고

비 맞은 장미 넝쿨엔 꽃이 벌써 피었구려.

시름은 언제나 나를 술에 빠뜨리고

봄빛은 시들어 고향집 그리게 하네.

시를 읊어 스스로 강엄의 한을 펴내니

새벽노을 읊조리는 풍류와는 같지 않네.

이 차시는 1601년 허균이 33세 때 고시관의 자격으로 전라도를 다녀오는 길에 지은 것으로 <남정일록>에 실려 있다.

해양(海陽, 지금의 전라도 광주) 회랑에서 석양을 받으며 햇차를 끓여 마시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고 보면 허균은 바쁜 와중에도 일부러 한가한 시간을 내어 차를 즐긴 것 같다.

차를 마시면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신선의 경지를 구가하였으니 역설적으로 혁명적 사고도 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신선이라는 것이 산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중에도 있음을 짐작케 한다. 허균이야말로 풍류차인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서 청담차, 풍류차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남미숙 香井다례원장, 시인·시낭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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