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질서’에 물들며
‘조용한 질서’에 물들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4.25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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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시집 ‘그리움도 사랑이다’를 출간한 뒤 3년 동안의 산고(?) 끝에, 제4시집 ‘조용한 질서’를 세상 밖으로 내보냈다. 3집을 출간한 뒤 동료 시인들이나 지인들에게 이제 시집은 마지막이라며 호언장담했건만,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나의 안에 사는 내가 일으킨 반란을 끝내 진압하지 못했다. 그러나 구구한 사연이야 슬쩍 접어두고라도 우선 미역국부터 좀 넉넉히 먹어야겠다. 마침 이달에는 양력 생일까지 끼어 있지 않은가.

요 며칠 사이, SNS를 통해 팬이나 지인들로부터 많은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축하의 글들이 쌓여 갈수록, 나의 안에서 웅크리며 사는 또 다른 내가 삼켜온 속울음은 그 축하에 비례한다고나 할까. 그간 4집을 내기까지의, 피나는 가시밭길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간다.

10년 전쯤의 일이다. 어느 늦가을로 기억된다. 재경 고교동창 모임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그날 참석한 어느 동기생이 옛 은사이신 K선생님의 근황을 전해 준 것이다. 국어 교사이자 담임을 맡으셨던 그분은 내가 고향 울산에서 고교 2학년 재학 중인 1974년 봄, 갑자기 서울 중대 부고로 전근을 가시게 되었다. 그 뒤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두절된 선생님의 소식은 더 이상 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울에 거주하시는 K선생님의 연락처를 알게 된 것이다.

동기 모임에 참석하고 며칠이 지난 뒤 나는 K선생님과 대학로에 있는 한 카페에서 극적인 해후를 하게 되었다. 30여 년의 짙은 그리움과 두터운 침묵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대화의 첫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할 순 없지만 선생님과 나는 숨 돌릴 틈 없이 밀린 추억담을 신나게 풀어 나갔다. 거침없는 세월 앞에, 영원한 문학청년을 고수하시던 선생님은 어느덧 고희(古稀)에 접어드셨고, 까까머리 제자는 초로(初老)의 신사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K선생님과의 대화가 뜨겁게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나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듯한 말씀에 화들짝 놀란 나는 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 다시 써라. 구차한 변명 대지 말고 무조건 등단할 준비해!”

1980년 초 출판계에 첫발을 내디딘 뒤 수십 년 동안 매너리즘에 푹 빠져 ‘문학’이란 단어와는 멀어졌던 터라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었다. ‘문학’이라는 두 글자만 봐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글 쓰는 일 외에는 어떤 것에도 흥미를 갖지 못했던 학창 생활은 이미 먼 옛날의 추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남 뒤부터 이어진 선생님과의 처절한(?) 줄다리기는 끝 모르게 이어졌다. 이미 녹슨 제자의 소질을 어떻게 해서든 다시 갈고 닦도록 유도해 보려는 스승의 깊은 사랑과, 빛바랜 현실을 핑계 삼아 적당히 피해 보려는 제자의 나약함이 서로 겉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굳어 버린 감성은 그리 쉽게 반응하지 않았다. ‘쓰고, 지우고, 찢고’를 되풀이 하며 어느 날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 포기의 수순을 밟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님과의 약속을 더 이상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사이 무겁게 닫혔던 거대한 문이 조금씩 조금씩 그 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윽고, 고진감래라 하였던가. 2009년 봄, 마침내 나는 모 문학지의 ‘신인상’으로 늦깎이 등단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나의 관절은 차츰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간 입은 선생님의 은혜에 대한 미미한 보답이라도 하듯 2012년에는 제3회 백교문학상을, 2016년에는 후백황금찬 시문학상을 수상하는 뿌듯함도 누렸다.

하마터면 현실에 안주, 그럭저럭 세월만 흘려보내고 나이테만 늘려갈 나의 인생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미 꺼진 것이나 다름없던 제자의 불씨를 되살려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해 주신 K선생님. 그분께 이 화창한 봄날, 엎드려 큰절을 올린다. 제4시집 ‘조용한 질서’를 펴내며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기게 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겁(劫)에, 부모나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 것은 1만 겁에 한번 꼴이라 하지 않았던가.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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