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베트남은?
우리에게 베트남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4.2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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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국민들에겐 대단히 죄송스러운 얘기지만, 43년 전 4월, 베트남의 전황은 한 편의 숨 가쁜 실존 드라마 같았다. 당시만 해도 문제의식이 없었던 필자는 하루가 무섭게 색깔이 달라지는 전투상황도를 보며 나도 몰래 베트남전쟁(1955~1975)을 즐기고(?) 있었다. 다음은 남쪽 월남군이 북쪽 월맹군에 패퇴하던 1975년 3∼4월, 현지 전황에 관한 글이다(출처:‘베트남 패망과 대한민국의 생존’).

<3월 26일, 전략요충지 다낭이 함락되어 중부월남 전 지역에 월맹군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4월 8일, 월맹군 지도부는 호치민의 생일(5월 19일)까지 월남 전역을 점령키로 하고 전 월맹군에게 사이공 공격 명령을 내렸다. 4월 9일, 월맹군 선두부대가 사이공의 관문 쑤안록에 나타나자 월남군은 처절한 사투로 12일간 지켜내다가 결국 4월 21일 쑤안록마저 내주고 말았다. 사이공을 포위한 월맹군의 대공세가 벌어지던 4월 28일, 월남 공군 조종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4월 30일 아침, 월맹군이 사이공 시내로 진입하자 두옹반민 대통령은 라디오로 항복을 선언했다.>

이 무렵 전쟁드라마의 주요무대는 ‘호치민시’로 이름이 바뀐 ‘사이공’이었다. ‘사·이·공’은 묘하게도 숫자 ‘4·2·0’을 연상시켰다. 극적 우연을 기대한 필자는 드라마 감상모드에 숫자 ‘4·2·0’을 대입시켰다. ‘사이공은 4·2·0(4월 20일)에 함락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유치한 기대치는 보기 좋게 빗나갔고, 사이공에 월남군의 백기가 올라간 것은 열흘 뒤인 4월 30일 이었다.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2018년 4월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는 부끄러운 기자회견이 하나 열렸다. 회견장엔 베트남 중부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의 학살생존자 응우옌티탄(58) 씨가 참석, 피눈물 나는 사연을 털어놨다. “남동생이 울컥울컥 피를 토해낼 때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러면서 반문했다. “왜 한국군은 여성과 어린아이뿐이었던 우리 가족에게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나요? 어째서 한국군은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50년이 넘도록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나요?”

회견장엔 동명이인이자 하미 마을 학살생존자인 61세 응우옌티탄 씨도 자리를 같이했다. 두 사람은 1968년, 한국군이 쏜 총에 가족을 5명씩이나 잃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잔인한 학살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참전했던 한국 군인들의 사과를 꼭 받고 싶어요. 최소한의 사과라도 있어야 용서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들은 21∼22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시민평화법정’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시민평화법정은 베트남 학살피해자가 원고가 되어 한국 정부를 피고석에 앉히고 학살 책임을 묻는 법정으로, 지난해 11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한베평화재단 등 24개 시민단체가 힘을 합쳐 준비해 왔다. 한 관계자는 시민평화법정을 “50년이나 지연된 정의를 세우고 진실을 밝히는 자리”라고 정의했다. 재판부는 김영란 전 대법관과 이석태 변호사, 양현아 서울대 로스쿨 교수가 맡았고, 김복동 일본군 ‘위안부’ 피해할머니는 연대사를 낭독했다.

지금도 베트남 여러 마을에는 한국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마을주민들의 이름이 적힌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는 여행객들의 증언을 몇 차례 들었다. 베트남인들이 거짓으로 꾸민 일일까? 얼마 전 베트남을 국빈방문한 우리 대통령이 유감을 정식 표명한 적은 있다. 하지만 진상규명에 나섰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 추행·학살’ 주장은 시민단체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도 ‘진상규명’ 차원에서라도 풀어야할 숙제다. 그래야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놓고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일본 정부에게 요구할 수 있을 것 아니겠는가.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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