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칼럼]울산이 낳은 멀티예술가 증곡 천재동
[이정호칼럼]울산이 낳은 멀티예술가 증곡 천재동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4.03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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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반가운 논문 한 편을 정독했다. 증곡(曾谷)의 제자이며, ‘천재동연구소’ 소장인 이기우가 쓴 <예술문화교육가 천재동의 조명과 문화콘텐츠화 정책 연구>라는 제명의 논문이다. 울산발전연구원에서 발행한 ≪2017 울산학 연구논총≫에 실린 네 편의 논문 중 하나인데, 울산 방어진 출신인 멀티예술가이자 만능엔터테이너인 천재동(千在東, 1915-2007) 관련 글이다. 연구자는 뛰어난 예술가였음에도 그의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고 있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과 증곡을 고향인 방어진을 중심으로 문화콘텐츠화해야 한다는 논지의 글을 담고 있다.

오래전에 시내 어느 전시실에서 본 천재동의 토우 전시회는 무척 인상 깊었다. 그 이후로 종종 그의 소식을 접하곤 했지만 세세히는 알 수가 없었다. 근래 소식으로는 증곡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울산 출신 인간문화재 천재동의 예술혼을 재조명하는 전시회가 2015년 초에 현대예술관에서 열린 바 있었다. 전통과 민족 고유의 미학을 담은 탈과 토우, 도자기, 동요민속화 등 160점이 출품되었다. 2년 전에는 동구의회 김수종 의원이 증곡의 업적 약술과 문화콘텐츠 확보 관련 글을 지역신문에 기고한 바 있다.

논문은 증곡을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200자 원고지 260매가 넘는 분량으로, 그의 예인생활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는 청소년기에 방어진에 있는 극장을 출입하면서 연극에 빠져들었다. 한편 집에 드나드는 과객들의 다양한 기예를 접하면서 예술적 감각을 키우기도 했다. 증곡은 17세(1931)에 방어진 상빈관에서 <부대장>이라는 극을 올렸다. 이는 방어진뿐만 아니라 울산 연극의 효시였다. 그 후 193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가와바다 회(繪,그림)학교에서 미술과 연극의 기초를 공부했으며, 서울 국민극연구소를 수료했다.

연극인으로서의 천재동은 광복 후 더욱 빛을 발했다. 방어진초 교사로 8년, 울산초 교사로 2년을 근무하면서 연극연출가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친구가 증언한 내용을 바탕으로 1946년에 <남매의 비극>을 연출했다. 태평양 어느 섬에 배치된 일본군 오빠와 그의 앞에 위안부로 끌려온 여동생이 서로 경악하며 자결했다는 내용이다. 또 일제의 잔악상을 알리는 <박제인간>이라는 희곡을 창작하고, 순회공연을 했다. 이때 같이 활동한 배우로는 윤항기와 윤복희의 아버지인 윤부길, 쓰리보이 신선삼 등이 있다.

증곡의 예인활동은 연극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가 만든 ‘바가지탈’은 송석하의 탈 자료를 모티브로 하여 민속공예품으로서의 가치를 한층 드높였다(1965 첫 전시). 한편 신라 토우에 착안하여 민중들의 모습을 흙으로 빚었는데, 그의 토우는 한국적 정서와 해학미가 넘치는 민속덩어리 자체였다(1968 첫 전시). 증곡은 또 양조복, 최용규와 더불어 1945년부터 1953년까지 광복기념 유화전시회를 가졌으니, 이 또한 울산 최초의 미술전시회였다. 그는 또 400여 편의 전래동요를 채록하고, 동요민속화를 그려 넣어 책으로 발간했다.

천재동은 근무지를 1955년에 부산으로 옮겼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인 <동래야류> 연희본을 정립하고 길놀이를 발굴했다. 이 <동래야류>에 사용된 탈을 제작한 공로로 인간문화재가 되었다(1971). 그 외 <동래지신밟기>의 연희본 정립, <동래부사 송상현 군사행렬> 도해화, <동래학춤> 무보 작성과 5안무 창안 등 부산의 민속예술을 크게 고양시켰다. 그래도 그는 울산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구전으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바다를 건너가는 처용무>라는 작품을 탄생시켰고, 또 <울산웅촌 외막지게 목발장단놀이>를 채록하고 발굴했다.

증곡은 교직 25년을 마감하고, 1970년부터 전업 작가로 나섰다. 그의 손끝에서 <동래야류>의 말뚝이탈, 길놀이 행렬도, 토속적 향취가 물씬 나는 토우와 동요민속화 등이 만들어졌다. 2007년 7월에 그의 나이 92세로 세상을 뜨니, 유골은 유언대로 대왕암 일대에 산골되었다. 그의 일생은 부인 서정자의 조력이 매우 컸다. 재봉틀과 바느질로 연극 소도구와 소품 제작을 도왔고, 63년 동안 증곡의 작품 활동을 도왔다. 부인은 열혈 독립운동가였던 ‘서진문(1903-1928)’의 딸이자 울산 동구의 ‘보성학교’를 세운 ‘성세빈’의 생질녀이기도 하다.

증곡 천재동은 이처럼 울산이 낳은 멀티예술가이다. 그는 희곡을 쓴 문학인이었고, 계몽운동을 주도한 연극인이었으며, 숱한 민속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또한 토우나 탈에 민중의 삶을 담은 공예가였으며, 우리 민속에 무한한 애정을 가졌던 인간문화재이다. 우리는 그가 남긴 위대한 발자취와 엄청난 양의 작품들을 울산의 문화콘텐츠로 삼아야할 의무가 있다. 이런 일이 어찌 ‘히나세 거리’ 조성보다 후순위가 되어야 하는가. 동구청과 동구문화원은 ‘증곡 아카이브(기록물보관소)’를 짓고, ‘증곡 문화콘텐츠의 플랫폼 탑재’를 서둘러야 한다.

이정호 수필가, 울산학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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