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송한 법조문들
아리송한 법조문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3.2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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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를 행하여 당함에 수행하면서…>, <타인의 점유에 속하는 자기의 물건을 취거함에 당하여 그 탈환을 항거하거나 체포를 면탈하거나 죄적을 인멸할 목적으로…>

“이 문장, 이해 가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글쎄,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엄연히 법전-형법 125조, 형법 325조 2항-에 있는 표현들이다.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더 있다. <大統領(대통령)으로 選擧(선거)될 수 있는 者(자)>-헌법 67조-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 그냥 “대통령 후보자”라고 쉬운 말로 적으면 될 것을 왜 이처럼 어렵기 짝이 없는 표현을 방치하고 있을까? 혹시 헌법학자가 자신의 유식함을 뽐내기 위해…? 그래도 그렇지, 그건 분명 아닐 것이다. 혹자는 일본 문장을 그대로 베끼다 보니 그런 걸 거라고 그럴 듯하게 토를 단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완장 찬 국어학자들이 앞장서서 까발린 것은 아니다. 관심 있는 언론매체들이 청와대의 개헌안 발표를 계기로 파헤쳐 놓은 일종의 고발장 같은 것이다. 청와대는 개헌안을 만들 때 ‘법률 조문은 불필요한 한자를 없애고 알기 쉬운 우리말로 고쳐서 적는다’는 원칙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MBC 뉴스데스크(3.16)는 국립국어원의 말을 빌려 “헌법 조문 137개 가운데 111개를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실이라면 헌법 조문의 81%가 오류투성이, 즉 바람직하지 못한 표현들로 채워져 있다는, 낯부끄러운 얘기다.

실례를 들어보자. 헌법 조문 중에 <國會(국회)로 還付(환부)하고>라는 표현이 있다. 청와대 개헌안은 이를 “국회로 돌려보내고”로 고쳐 적었다. 이 원칙을 곧이곧대로 적용한다면, 한때 전국적으로 망신살을 뻗치게 만들었던 저 유명한 울산의 ‘고래고기 환부 사건’ 이름도 ‘고래고기를 돌려준 사건’으로 고쳐 써야 할 판이다.

헌법은 물론 민법, 형법 조문까지 예로 들자면, 잘못된 표현은 그야말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기망(欺罔, 헌법 12조)→속임수, △주류(駐留, 헌법 60조)→주둔, △포태(胞胎, 민법 820조)→임신, △몽리자(蒙利者, 민법 23조)→ ‘이익을 얻는 사람’, △상린자(相隣者, 민법 235조)→‘서로 이웃한 사람’은 단어를 잘못 사용한 보기다.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하였거나(형법 48조)→범죄행위로 생겼거나, △직무를 행하여 당함에(형법 125조)→ 직무를 수행하면서… 따위는 문장을 잘못 사용한 보기다.

재미난 표현은 민법 201조에도 있다. <은비에 의한 점유자>가 그것. 여기서 ‘은비(隱秘)’란 ‘숨겨 비밀로 함’이라는 뜻이다. 한 네티즌은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도 이 단어가 나온다며 일본식 표현을 우리 민법 조문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 아니냐며 혀를 찬다. 그는 “일본 것을 그대로 가져와서 베껴 쓴 것”이라며 언론의 책임도 같이 묻는다. ‘스킨십’, ‘멘붕’ 같은 일본식 조어를 줏대 없이 갖다 쓴 쪽은 언론이라고 나무라는 것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다. ‘일본식 표현 빼면 시체’라는 말이 나오게 만든 책임론에서 언론이라고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법제처가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시작한 것은 2006년부터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법령 수는 4천713개나 된다(2018.3.5 현재). 그러나 그 진척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정부 당국의 공식 발표가 없어, 속속들이 가늠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기대를 버릴 수 없다. 청와대의 개헌안 발표를 계기로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작업에 가속도가 붙었으면 하는 기대 말이다.

차제에 일본식 표현, 한자투 표기를 생태교란종 ‘환삼덩굴’을 걷어내듯 시원스레 걷어치웠으면 한다. ‘갈취(喝取=남의 것을 으름장을 놓아 억지로 빼앗음)’, ‘편취(騙取=남을 속여 재물이나 이익을 빼앗음)’ 따위의 용어도 일본식이 맞다면 지체 없이 ‘퇴치’ 대상에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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