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학 칼럼]‘정을 쌓는다’
[박정학 칼럼]‘정을 쌓는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3.1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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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연히 부엌에서 독특한 일을 하게 되었고, 그 일을 하면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에 연결고리가 되는 정(情)에 대한 실감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감기비방으로 달여 놓았던 감꼭지차를 데워 마시려고 전기렌지에 올려놓고, 7분 만에 꺼지도록 스위치를 조절해 놓았다. 하지만 바로 3분쯤 후에 마시려다가 깜빡 잊고 20분쯤 후에 와서 보니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던 찻물이 다 졸아지고 일부 건더기들이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 집사람이 보고 닦으려고 하다가 잘 안 된다면서 ‘힘센 당신이 좀 닦아보라’고 했다.

원죄가 있으니 꼼짝없이 수세미를 들고 닦는데, 바닥에 시커멓게 눌어붙은 것이 센 힘으로 민다고 단번에 없어지지는 않았다. 5분쯤 이리저리 해보다가 요령을 터득했다. 힘을 줄여 20번, 50번, 100번을 닦으니 원래대로 쇠의 흰 바탕이 드러났고, 마지막으로 50번쯤 더 문지르니 처음의 상태보다 더 새것처럼 깨끗해졌다.

그 순간,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하고 들었던 여러 가지 사실들과 연결되면서 ‘아, 이것이 우리 조상들이 깨달은 우주의 원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무슨 뜻인지 잘 모르더라도 수십 번을 읽고 외우면 자연스럽게 의미가 이해되고 한문의 문리(文理)가 터득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천자문을 배운 적이 있다. ‘화가 날 때는 속으로 참을 인(忍)자 100번을 외고 나서 다시 생각하라’는 말을 책에서 읽은 기억도 난다. 최근에는 주역(主易) 공부를 하면서 기본 원리나 그 원리에 맞는 노래를 배우면서 ‘달달달 외우면 그 의미가 느껴진다’늘 말도 들었다. 불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하나인 사경(寫經)에 대해 ‘금강경을 100번, 1천 번씩 베껴 쓰면, 의미와 함께 공덕도 쌓여 간다’는 말이 있다. 경험도 같이 쌓여 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리(文理, 이치)나 의미, 공덕, 경험과 같은 비물질적·비가시적인 것은 돌이나 벽돌처럼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물질적·가시적인 행동은 반복을 통해 체득되고 넓어진다. 이러한 우주의 원리를 우리 조상들은 ‘쌓는다’는 말 속에 남겨놓았다.

또,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 사이를 크게 더 하라’, 즉 너와 나의 사이를 두텁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앞서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두텁게 하라’는 말과 같이 반복해야 할 물질적 또는 가시적 행동을 전제하지 않고 비물질적인 것을 ‘쌓는다’고만 하는 경우도 있으니, 바로 우리가 많이 쓰는 ‘정(情)을 쌓는다’는 말이다.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무슨 행동을 반복해야 할지는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옛날, 선도 보지 못한 탓에 상대를 전혀 알지 못하고 결혼한 부부에 대해 ‘살다보면 정이 쌓여 진짜 부부가 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들은 적이 있다. 부부가 첫날밤부터 한 방을 쓰면서 부부관계나 식사를 같이 하고, 자식을 낳아 함께 키우고, 집안 대소사를 같이 의논하고 치르는 일을 반복하는 가운데 정이 ‘쌓인다’는 말일 것이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하지만, 때로는 부부싸움을 통해서도 정이 쌓이는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정(情)이 쌓이면 너와 내가 ‘우리’로 한 덩어리가 된다. 부부가 미워도, 자식이 부모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어도, 친구나 동료들과 뜻이 같지 않아 다툴 때가 있더라도, ‘이해하고, 참고, 용서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정을 쌓아서 남이 아닌 우리를 만드는 길’이라는 게 조상들의 가르침이다. 지금까지 칼럼을 통해 소개한 제사와 잔치, 회포풀기, 음주가무 따위도 정을 쌓는 방법으로 자주 반복하라고 생활문화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바닥에 눌어붙은 검정을 닦으면서 ‘반복하라’는 조상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준 마누라가 무진장 고맙게 느껴졌다.

박정학 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예비역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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