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칼럼]다산의 땅, 남양주 능내리를 가다
[이정호칼럼]다산의 땅, 남양주 능내리를 가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3.12 21:2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해 초겨울 어느 날 친구의 가평 별장에서 이틀을 묵었다. 사흘째 되던 날 남이섬에 갔다가 귀가할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어쩌다가 남이섬 진입로를 놓쳐버리고 길을 달리는데 ‘다산유적지’ 안내판이 보였다. 안 그래도 한번 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담고 있던 차에 마침 잘됐다 싶어서 목적지를 다시 설정하고 찾아드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다산은 내 마음 속 최고의 상우고인(尙友故人)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남양주에 있는 다산의 땅을 딛게 된 그날은 처음으로 다산초당을 찾던 눈발 휘날리던 어느 날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산유적지는 생가인 여유당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적절한 규모의 짜임새를 보이면서 거의 한눈에 다 들어왔다. 동상을 기점으로 사당과 묘소 가는 길이 보이고, 생가 앞쪽으로 다산문화관과 다산기념관이 있었다. 여유당 앞을 지나는 중심도로 왼쪽으로 다산의 주요 저서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석물들이, 오른쪽에는 거중기와 배다리 모형이 배치되어 있었고, 끄트머리쯤에는 실학박물관의 내부 구조 개선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가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묘소 입구에 자찬묘지명이 소개되어 있었다. 원래 묘지명은 사후 타인이 고인의 일생을 정리하여 문집에 실을 집중본(集中本)이나 무덤 속에 넣을 광중본(壙中本)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다산은 자신이 직접 쓴 것이다. 나의 선고(先考)가 남기신 글의 제목을 ‘자찬묘지명’으로 정하여 비를 세워드린 것은 다산을 따라 한 것이다. 언덕을 올라 무덤 앞에 서니 마음은 숙연해지고 자세는 저절로 공손해졌다. 살아계신 선생을 뵈옵듯 공경의 예를 올렸다. 선생은 아마도 이곳에 영면하시며 세상을 굽어보실 것이고, 찾는 이들을 반가이 맞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광주 마재(현 남양주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28세에 대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다. 성균관 직강, 경기도 암행어사, 홍문관 부교리 등을 거쳤다. 그를 총애하던 정조가 승하(1800)하자 마현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호를 ‘여유당’이라 명명하고 겨울 냇물 건너듯 조심스럽게 침잠하려던 시간도 잠시, 신유옥사(1801)가 일어나 집안은 풍비박산되었다. 바로 위의 형 정약종과 조카 장하상, 매형 이승훈, 질서 황사영이 순교하고 다산은 이듬해에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8년간의 유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유배 초기는 제자 육성에 힘썼고, 1808년부터 다산초당에 머무르며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818년에 해배되어 고향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유배기간을 저술활동으로 승화시켰다. 회갑(1822)을 맞아 자신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총괄하여 <자찬묘지명>을 지었다. 회혼일(1836)에 세상을 떠나 고향집 뒷동산에 안장되었으며, 그해에 다산의 저술들이 모두 필사되어 궁내에 수장되었다. 조정에서는 1910년에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정인보가 중심이 되어 1936년에 《여유당전서》를 간행했다.

다산은 조선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개혁가였다. 후세 사람들은 다산을 가리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견한다. 거의 모든 분야에 관통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개혁방향을 제시한 ‘경세유표’, 목민관의 자세를 지적한 ‘목민심서’, 형벌의 신중함을 지적한 ‘흠흠신서’ 등 일표이서가 그의 역작이다. 경학집 232권과 경세학서 138권에, 시문집 등 약 500여 권을 저술했다. 다산의 저술과 사상의 요체는 ‘개혁’이다. 나라를 구하고 바로 세우는 길은 토지를 비롯해 개혁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산은 깊이 통찰한 것이다.

젊은 날의 다산을 울산 선비들은 반겼다. 아버지 정재원(1730-1792)이 1789년 4월에 울산부사로 부임한 후 다산은 형 정약전과 같이 울산을 찾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울산 선비들을 소개했다. 학고 이준민, 반계 이양오는 부모 뻘이고, 죽오 이근오, 신암 이운협은 비슷한 또래였다. 다산이 울산 선비들과 어울리면서 지은 글이 여유당전서에 실려 있고, 정약전이 반계에게 보낸 간찰이 전한다. 학고와 반계는 정 부사의 회갑시에 차운했고, 이듬해 동짓달에 진주목사로 영전하자 도임에 동행했다. 그는 그 흔한 선정비 하나 남기지 않은 청렴한 사또였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마재 앞에서 합수되어 흘렀다. 지금은 한강의 마지막 댐인 팔당댐으로 인해 마치 곶처럼 호수 쪽으로 나와 있는 형태이다. 남양주는 다산으로 인해 얻는 것이 참 많다. 다산길이 그러하고, 유네스코가 인정한 학습도시, 남양주박물관도 다산과 무관하지 않다. 다산의 삶과 업적이 유네스코 이념과 일치하여 2012 유네스코 기념인물로 선정되었음도 큰 자랑이다. 친일파 민영휘가 후손에게 남긴 남이섬에 돈을 보태주기보다 남양주의 다산유적지를 찾는 것이 훨씬 마음의 보약이 된 의미 깊은 여행길이었다.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