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角)의 정부, 원(圓)의 정부
각(角)의 정부, 원(圓)의 정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3.11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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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角)은 ‘두 개의 직선이 만든 도형’ 또는 ‘한 점에서 그은 두 개의 반직선에 의해 이루어진 도형’이다. 두 직선의 한 끝이 서로 만난 지점이 각의 꼭짓점인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늘 뾰족한 모양이다. 수학자가 아닌 우리에게 흔히 각은 도형 전체로서가 아니라 꼭짓점과 그 언저리만으로 생각되며, 얼마나 예리할까 하는 반사신경이 절로 작동된다.

원(圓)은 ‘평면 위의 한 점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들로 이루어진 곡선’이다. 컴퍼스로 한 끝점을 고정하고 다른 한 끝점을 한 바퀴 돌리면 원이 된다. 이때 컴퍼스로 찍은 점 즉 원둘레의 모든 곳으로부터 항상 같은 거리에 있는 점이 원의 중심이다. 대개 원이라 하면 우리는 이러한 완전한 원뿐 아니라 그저 둥그런 모양과 그 안의 공간을 함께 떠올린다.

각에서 파생된 ‘대립각’은 의견이나 처지, 속성 따위가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되어 생긴 감정을 이르는 말이다. ‘각지다’는 물체의 생김새가 부드럽지 아니하고 모가 나 있다는 뜻이다. 모는 각과 가장 가까운 말로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은 너무 강직한 사람은 남의 공박을 받기 쉽다고 할 때 쓰인다. 적어도 비유어로서의 각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원에서 파생된 ‘원만하다’는 성격이 모난 데가 없이 부드럽고 너그럽다거나 일의 진행이 순조롭다, 서로 사이가 좋다는 말이며, 또 ‘원활하다’는 모난 데가 없고 원만하다거나 일이 거침없이 잘되어 나가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성격을 두고 모가 나지 않고 원만하다고 할 때는 ‘둥글다’라는 말을 쓴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 둥글게 살라고 한다. 그렇게 배우고 또 가르친다.

정부의 고객은 처음도 끝도 국민이다. 국민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정부는 각의 모양을 띠거나 원의 모양을 띤다. 각은 이리저리 찔러 따지는 성격을 지녔고, 원은 그냥저냥 보듬어 품는 성질을 지녔다. 그러므로 각의 정부는 법령과 합법적 권위에 따라서만 국민을 다스리는 거번먼트를 하고, 원의 정부는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감성을 중시하여 국민과 함께하는 거버넌스를 한다. 지난 세기의 정부가 각의 정부를 추구했다면 이번 세기의 정부는 원의 정부로 나아가야 한다.

각의 정부는 수직적이고 남성적이며, 원의 정부는 수평적이고 여성적이다. 각의 정부는 뾰족한 각으로 국민을 대하기에 접촉면이 작은 데다 듣는 소리도 적고, 원의 정부는 둥그런 원으로 대하기에 접촉면이 큰 데다 듣는 소리도 많다. 각의 정부는 귓가에서 속삭이는 기득권자들의 가까운 소리에 민감하고, 원의 정부는 보이지 않는 데서 겨우 들려오는 일반 국민의 먼 소리를 더 궁금해 한다. 각의 정부는 차갑고 날카롭고 너무 높으며, 원의 정부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언제나 낮다. 각의 정부는 ‘그건 아닙니다’라며 문제의 잘잘못을 찔러 따지는 데 익숙하고, 원의 정부는 ‘아 그러시군요’라며 보듬어 품는 데 익숙하다. 인가, 허가, 규제, 민원 업무도 각의 정부는 원리원칙부터 내세우며 시혜처럼 처리하고, 원의 정부는 공감의 눈길부터 주고 손 내밀어 내 일처럼 처리한다. 각의 정부는 정책 공급자 중심이고, 원의 정부는 정책 수요자 중심이다.

각의 정부는 평균과 표준을 강조하고, 원의 정부는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한다. 관료적인 의전 위주인 각의 정부의 행사는 자신의 자랑거리를 보이면서 박수받기에 골몰하고, 자율적이고도 유연한 원의 정부의 행사는 국민들의 자랑거리를 보면서 박수하기를 즐겨한다. 국민과의 만남이나 여러 위원회 또한 각의 정부는 요식으로 치르면서 시끄럽고, 원의 정부는 어깨를 겯고 경청하면서 조용하다.

지난 세기까지의 정부가 각의 정부였다면 이번 세기의 정부는 원의 정부여야 한다. 그렇다고 원의 정부가 각의 정부의 가치를 다 버려야한다는 뜻이 아니다. 원은 각을, 원의 철학은 각의 철학을 마땅히 포함한다. 원의 안쪽에 수많은 각들이 내접(內接)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원의 정부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의 정부가 쌓아온 각고의 노력과 함께 스스로 진화하는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최근 칼럼집 <이성정부에서 감성정부로>에 실린 칼럼 중 유일한 미발표 원고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싣는다. -편집자 주

박상언 울산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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