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밝이술’은 총명주(聰明酒)
‘귀밝이술’은 총명주(聰明酒)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3.0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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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은 무술년 정월대보름이었다. 올해도 관례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달집태우기 행사를 치렀다. 울산 5개 구·군에서도 달집태우기와 농악으로 마무리했다.

정월대보름날 한 잔 술을 마시는 세시풍속이 있다. ‘귀밝이술’이라 부르는 이 술은 일상의 술과는 의미가 다르다. 귀밝이술을 한자어로 이명주(耳明酒)·명이주(明耳酒)·총이주(聰耳酒)·치롱주(治聾酒)·청이주(聽耳酒) 등으로 부르는 사실에서도 그 의미가 감지된다. 이명, 명이, 총이, 치롱, 청이와 같은 단어에서 ‘청(聽)’과 ‘명(明)’이 공통적으로 들어간 것도 흥미롭다.

귀밝이술은 정월대보름 이른 아침에 가족이 모여 한 잔씩 마신다. 술은 탁한 것보다 맑은 것을 택한다. 마시는 순서는 어른과 아이가 뒤바뀐다. 아이들이 먼저고 어른은 나중에 마신다. 굳이 청주를 먼저 내놓고 어린아이부터 먼저 마시게 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아이들의 귀가 밝아져서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듣고 한 해 동안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길 소망하는 것이다.

궁금한 것은, 왜 하필 정월대보름에 귀 밝기를 부각시키나 하는 점이다. 오장육부(五臟六腑) 중에 귀부터 밝게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듣게 하려는 그런 이유뿐일까? 우리는 매우 영리하고 재주가 남다른 아이나 어른을 ‘총명한 아이’, ‘총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때 쓰는 한자 ‘총명(聰明)’은 ‘귀와 눈으로 바로 듣고 바로 본다’는 뜻을 지닌다. 총명은 바르고 분명하게 듣는 것을 말한다. 바른말이 아니면 듣지 않는 것이다. 세이암(洗耳?), 세이담(洗耳潭) 등의 이야기가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총명과 비슷한 의미로 ‘지식(知識)’이라는 단어가 있다. 지식에서 ‘지(知)’는 눈으로 보고 아는 것, ‘식(識)’은 귀로 들어서 아는 것이다. 총명과 지식을 실천적으로 말한 것이 아난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이다. 불경에서 바르게 듣고 바르게 전달하는 것을 여시아문(如是我聞=’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이라 한다. 불전의 첫머리에 반드시 등장한다.

봉제사, 접빈객에서 권하는 음복(飮福)은 기분 좋게 취하라고 마시는 술이 아니다. 그 음복에도 귀와 눈의 총명함을 증장하려는 조상의 지혜가 담겨있다. 이산혜연 선사의 발원문에서도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라고 하여 귀와 눈의 총명함을 불전에 발원하고 있다.

<성론>에서는 착한 인연을 심는 윤회로 소경과 귀머거리가 우환을 극복한 일을 적고 있다. <지장경>에서는 삼보를 비방하는 이를 보면 눈멀고 귀먹고 벙어리 되는 과보를 말해주며 어리석음을 경계하고 있다.

불교 수행자의 목적 가운데 제일은 지혜를 늘려 더 자라게 함이다. 증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인 어리석음을 타파하기 위해서이다.

<소학언해>에서도 맹자의 말씀을 빌어, 세속에서 이르는 다섯 가지 불효 가운데 하나로 ‘귀와 눈의 욕심을 좇아 부모를 욕되게 함이 네 불효’라고 하여 경계하고 있다. 불교의 여섯 가지 신통력에서도 천안통(天眼通)과 천이통(天耳通)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바르게 보는 눈과 바르게 듣는 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시자 눈이 밝아지고 완전히 성해져서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는 성경의 <마르코>(=마가복음), 심봉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심청전>,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신 예수(요한9:1), 태어난 지 다섯 살 때 문득 눈이 먼 희명의 아이의 눈을 밝게 한 관세음보살(삼국유사 3권) 등에서는 모두 눈과 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서경(書經)’까지 참고하면, 총명의 의미는 더욱 확실하게 이해된다. ‘바르게 듣는 것을 청왈총(聽曰聰), 밝게 보는 것을 시왈명(視曰明)’이라 했다. 귀 밝음과 눈 밝음은 지혜를 증장시키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총(聰) 또한 사물의 본질을 슬기롭게 듣는 혜청(慧聽)을 말하는 것이며, 명(明)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혜안(慧眼)을 말하는 것이다.

조상들이 일상에 먹던 맑은 술 한 잔을 정월대보름에 먹는다 하여 귀밝이술로 부른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무술년 정초에 먹은 귀밝이술 한 잔이 어리석음을 지혜로 바꾸며(轉迷開悟), 개인보다 공공을 먼저 생각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총명주(聰明酒) 효과로 이어져 삼백육십오일 병 없고 관재구설(官災口舌) 없는 소원성취의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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