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것은 기차
긴 것은 기차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2.25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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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신정에 외손자가 놀러왔다. 그것도 현해탄을 넘어서 말이다. 기껏 올 8월이면 만 3살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그놈이 좋아하는 것은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 구경이다. 집안에서 실컷 놀다 심심하면 가까이에 있는 철로로 구경하러 가자고 떼를 쓴다. 아이의 눈매를 보면 초롱초롱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니 제 엄마가 기차에 관한 책자를 마지못해 여러 권 사주었다. 다양한 기차 사진이 있어 어른이 봐도 놀랄 정도다. 우리말로도 잘 하다가 심심하면 일본어로 마구 지껄인다.“제이알신쥬크센(JR新宿線), 마르노우치센(丸の?線), 치토세센(千?線) …” 하고 줄줄 왼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기차명은 빠삭하다.

정말 일본이라는 나라는 기차 천국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1억이 넘는 인구에(2017년 1억2천600만) 긴 열도를 오고 가자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일본에는 초등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자생적으로 기차 마니아가 많이 생겨 철도문화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색깔로 구분하는 기차, 디자인으로 판단하는 기차, 2층으로 되어있는 기차 등 다양하다. 심지어 도시락(에키벤, ?弁)에까지도 기차 모양을 한 것을 판매하고 있으니 철도문화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사전에서 ‘마니아’(Mania)라는 말을 한 가지 일에 몹시 열중하는 사람으로 설명한다. 통칭 철도 마니아를 이야기할 때는 철도에 관한 사진, 모형, 여행, 승차권수집을 포함하는데 우리나라에도 10만 명 정도 있다 한다.

일본의 철도 마니아는 서양보다 늦게 생겨났으나 1970년대 이후 부쩍 유행되었다. 작은 영토에 과밀 현상을 보이는 철도노선과 오타쿠 문화에 연관되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기차 마니아’의 원조는 체코의 작곡가드보르작(A. Dvo?ak, 1841~1904)을 들 수 있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때, 그는 자기 나라에 철도가 완공된 후 어느 날 군인들을 가득 실은 기차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장면을 우연히 본다. 체코 프라하와 독일 드레스덴을 연결하는 철도노선에서다. 매일 지나가는 기차를 본 그는 유년기에 벌써 정밀함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넓은 세계’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16세 때 25km나 떨어진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기차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매일 아침 시내에 있는 터널 위로 올라가 중앙역으로 드나드는 열차의 번호와 생김새 등 자잘한 사항들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나는 기관차의 거대함과 그 신통한 재주가 좋아! 다양한 부품이 수많은 부분을 구성하였고 그 모두가 제각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가!”라고.

성년이 된 이후도 ‘음악’ 이외 ‘기차’에 관심을 놓지 않았다. 특히 프라하와 빈을 왕복하는 특급열차를 좋아한 그는 시간표와 기관차의 소소한 부분까지 꿰고 있었다. 철도 종사자들보다도 더한 철도광이었다.

그런 연유에선가 그의 유머레스크 전 8곡 중 봄날에 자주 들리는 아름다운 선율 ‘유머레스크 7번’은 기차의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작품이다. 현악 사중주곡 12번 ‘아메리카’도 마지막 4악장의 빠르고 흥겨운 첫 주제부터 기차여행의 흥겨움을 잘 묘사한다.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의 4악장 오프닝 부분에서도 기차의 출발을 스케치한 장엄한 작품이다. 강렬한 포르테(forte)의 첫 음부터 현의 주도로 가속이 붙으면서, 정점에서는 트럼펫이 인상적인 제1주제를 묘사한다.

한 사람의 인생관은 유년기의 환경에 많이 좌우된다. 무엇이라도 마니아가 된다는 것은 동기부여뿐 아니라 인생관 확립에 중요한 요소가 됨을 인식해야 한다. 동시에 그에게는 행복의 길로 들어서는 관문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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