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에 관한 명상
늙음에 관한 명상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2.2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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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늘 돌인들 무거우랴.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무슨 꿍꿍이속인지 손자 놈이 곁에 바짝 다가앉아서 반복해서 소리 지르는 옛시조가 하필이면 송강 정철의 작품이다. 아직 귀밝이술을 먹지 않았는데도 귀에 퍼펙트 골드(과녁의 한가운데, 正鵠)로 꽂힌다. 계속해서 듣자니 머쓱해진다. 젊잖게 한마디 했다. “너 방에 들어가든지, 소리 좀 낮추든지…” “외워서 내일 발표해야 합니다.” “그래 누가 뭐라 하나. 들어가서 하든지 아니면 소리를 좀 작게 하라는 거지…” 입이 댓 발 정도 나오고 뿌루퉁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정철의 시조에 민감한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지난 1월 14(일) 오후 3시40분경 남구 삼호동 철새공원 꽃밭 구석에서 부리를 깃에 파묻고 웅크리고 있는 떼까마귀 3마리를 발견했다. 경험적으로 순간 몸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것을 직감했다. 천천히 허리를 굽혀 접근하는데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넓은 공간으로 걸어 나갔다. 달려드니 역시 날지를 못하고 잔걸음을 반복했다. 한참을 쫓아다니다가 마침내 잡았다. 그도 나도 이미 지쳤다. 무게가 무척 가볍게 느껴졌다. 부리를 살펴보니 흰색의 기부(肌膚)가 상당히 거친 것으로 보아 자연사에 가까운 늙은 떼까마귀였다. 노아(老鴉)들이 젊은 건아(健鴉) 무리와 함께하지 못하고 같은 처지로 구석진 곳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생에서 늙음은 자연계를 지배하는 섭리지만 막상 대상을 마주하니 가슴이 찡하다. 이들은 어둠이 서서히 주변을 감싸기 시작할 때면 길고양이, 너구리 등 활동이 왕성해지는 야행성 동물의 표적이 되어 살아남기 어렵다. 그 후 갖은 정성이 요양과 보약으로 작용했는지 곧 죽을 것 같던 그들은 갈수록 울음소리가 우렁차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체는 예외 없이 오래 살기를 원한다. 백년가약, 무병장수, 수명장수, 수복강녕 등에서 수(壽)가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늙음에 관한 명상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비록 의학과 먹을거리가 풍부해 평균수명이 늘어난 현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인생 육십 중반을 넘기면 육체가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누구나 한두 번은 자신의 존재와 육체의 변화에 대해서 깊은 명상을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늙는다는 아쉬움에 대한 표현과 비유는 다양하다. ‘차라리 비상(砒霜)을 먹고 견딜지언정 나이 먹고는 못 견딘다’,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음식은 나이 먹는 것’, ‘행상 알맹이’, ‘산송장’, ‘방에 누우나 산에 누우나’ 특히 ‘이빨 빠진 호랑이 산토끼 잡아놓고 침만 바른다.’라는 표현에서는 서글픔마저 느껴진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산토끼를 잡아놓고 씹지를 못해서 침만 바르고 있다는 비유는 곱씹을수록 애잔하다.

젊어서는 생기지 않던 눈썹털이 길고 끝이 위로 길게 뻗는 호랑이의 눈썹털 호미(虎眉)가 한두 개 생기기 시작하며, 그것도 모자라 눈썹이 짙어지고, 검버섯이 얼굴 곳곳에 자리를 잡게 되면 늙음의 사자가 함께하는구나 생각해야 한다.

늙음을 스스로 느끼는 사례를 찾아보았다. 정약용(丁若鏞·1762∼18 36)은 57세 이후에 지은 시 ‘영원히 당대를 결별하며(永訣當代)’에서 “지난 세월을 헤아려보니 놀랍도록 이미 늙어 있고(商略時光驚己老)”라고 자신의 늙음을 표현했다.

홍자성(洪自誠·1573∼1619)은 채근담(菜根譚)에서 늙음의 현상을 ‘머리카락이 빠지고 이빨 사이가 멀어지는 발락치소(髮落齒疎)’라 했다.

이옥(李鈺, 1760~1815)은 경문(鏡問)에서 마흔아홉 살 늙어감에 대한 글을 썼다. 그중 한 문장이 “나는 모르겠다. 너의 얼굴에서 지난날엔 가을 물처럼 가볍고 맑던 피부가 어이해 마른 나무처럼 축 늘어졌느냐?(생략) 지난날 봄풀 갓 돋은 것 같던 수염이 어이해 흰 실이 길게 늘어진 듯 되었느냐?”이다.

현대사회에서 늙음에 관한 명상은 바뀌어야 한다. ‘인간칠십고래희(人間七十古來希)’에 목숨만 어렵게 버티어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나이 70에 능참봉 되니 거동이 한 달에 스물아홉 번’이란 속담같이 적극적인 삶을 생각할 것인가? 인생의 산전, 수전, 공중전, 지하땅굴전을 모조리 경험하여 경륜을 쌓은 노인은 지혜가 생긴다. 이를 ‘세월테’라 말한다.

멋진 늙음은 배려와 겸손 그리고 봉사에 있다. 확대하면, 얼음 같은 청정(淸淨)한 마음과 어떤 대상자와도 두루 어울리는 원만(圓滿)한 실천 그리고 용기(容器)에 따라 자유자재로 모양이 바뀌는 물 같은 행동이 바로 멋진 늙음이다. ‘하늘은 세월을 더하고 사람의 나이 늘어만 간다(天增歲月人增壽)’는 말을 듣고 울컥하여 소주잔 기울이는 쪼잔함을 보이지 말라. 다만 멋진 늙음의 세월테 없음을 아쉬워하라. 지금이라도 지혜의 노하우가 함축된 세월테를 만들면 어떨까?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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