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銃) 권하는 사회’
‘총(銃) 권하는 사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2.2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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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견이지만, 돈놀이의 귀재 도널드 트럼프를 미국 백악관 상석에 앉힌 것은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미국 특유의 역사적·사회적 토양이 그에게 부(富)와 함께 최고 권력의 완장까지 채워 주었다는 것이 필자의 짧은 소견이다.

미국적 토양의 상징 가운데 하나에 프로레슬링단체 WWE가 주도하는 미국식 프로레슬링 세계가 있다. 사각 링은 물론이고 WWE의 히트상품인 철창형 방(→elimination chamber)에서도 정의(正義)니 신사도(紳士道)니 하는 고급언어는 고리타분한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다. 뒤통수를 향해 총질하는 일은 없다는 ‘서부영화식 신사도’는 흥행 차원에서 포장된 위장 쇼의 소도구일 뿐이다. 한데도 WWE 마니아들은 광기(狂氣) 하나에 목숨을 걸고 광기 하나로 열광의 도가니에 몰입한다. 트럼프를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교’의 교주(敎主)로 만든 것은 바로 그들의 광기라는 것이 혹자의 지론이다.

하지만 이것도 수백만 회원을 거느리고 버지니아 주에 본부를 둔 로비단체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전미총기협회)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미국적 토양의 가장 큰 상징이 NRA이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은 유태인과 NRA’란 말이 있을 정도로 NRA의 파워는 상상을 초월한다. 정계만 해도 그렇다. 돈줄이 필요한 미국 정치인들에게 NRA가 미끼삼아 던지는 거액의 정치자금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NRA 로비의 대상은 보수 성향 공화당 정치인들이 대부분이고, 트럼프는 그 정점에 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정치자금 추적 웹사이트 ‘오픈 시크릿’ 뉴스(2012. 12)에 따르면 NRA는 그 전 해에 로비 비용으로 290만 달러(약 33억원)를 사용했고, 그 해 로비 자금의 88%를 공화당, 11%를 민주당에 건네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마디로 미국은 ‘총(銃) 권하는 사회’다. 미국의 역사가 그렇게 만들었다. 어떤 이는 미국이 원주민 인디언을 학살하고 들어선 나라인 만큼 기본적으로 ‘총으로 세운 국가’라고 꼬집는다. 이후에도 독립전쟁과 서부개척 역사에서 개인의 총기 소지가 큰 역할을 했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배경을 깔고 태어난 것이 미국의 ‘수정헌법 제2조’로, “무장한 민병대는 자유로운 국가 수호의 핵심이므로 개인의 무장 소유 및 휴대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난 14일, 17명의 아까운 목숨을 앗아간 플로리다 주 더글러스 고교의 총기난사 사건 직후 트럼프가 한 소신발언이나 전미총기협회가 내뱉은 맞장구발언에는 미국인들마저 실소를 금치 못했다. 트럼프는 자신이 ‘교사들에게 총을 주자고 했다’는 CNN, NBC 뉴스를 ‘가짜뉴스’라고 내리찍으면서 “내 말은 군대나 특별훈련 경험이 있는 능숙한 교사들에게 은닉 총기를 줄 가능성을 검토하자는 것”이라고 한 발 물러섰다. 웨인 라피에르 NRA 부회장은 “학교는 총기 없는 공간이다 보니 정신 나간 사람들의 타깃이 되고 있다”며 ‘교사무장론’을 적극 옹호했다. 또 “나쁜 사람의 총기 사용을 막으려면 좋은 사람이 총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궤변도 늘어놓았다. 사건 직후엔 “밸런타인데이에 총기를 선물하라”고 부추겨 빈축을 사기도 했다. ‘머니 퍼스트(Money First)’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간 군상들을 보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하다.

학생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것은 당연지사였다. NRA에서 선거자금을 받은 정치인들과 총기규제에 미온적인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부끄러운 줄 알라”며 분노를 터뜨린 이 학교 에마 곤살레스 양은 일약 ‘SNS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대한민국이 ‘술 권하는 사회’라면 미국은 ‘총 권하는 사회’다. 미국에서는 총기난사 사건이 2000년대에만 16건이 일어났고, 사망자만 300명에 이른다니 참으로 한심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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