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과 시간
올림픽과 시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2.12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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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올림픽이 한창이다. ‘겨울 올림픽’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개막식을 보는 내내 마음이 벅차다. 평창 올림픽이 열리는 때도 잘 모를 정도로 무심했던 지난날이 살짝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동안 나라 안팎으로 너무 많은 사건이 생겨 올림픽을 기다리고 즐기기엔 겨를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올림픽 하면 떠오르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잠실 주경기장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오륜기가 선명한 경기장 앞, 그 시절의 유행 패션을 보여주듯 나는 상·하의 모두 청청 패션이다. 엷은 청색의 셔츠와 청바지, 흰색 운동화 차림의 나와 살굿빛 치마 정장에 스카프를 맨 어머니가 나란히 선 모습이다. 올림픽이 한창이던 그 해, 어머니를 모시고 육상 경기를 보러 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 모녀가 아닌 다른 일행이 있었는지 세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어렴풋이 그 시간을 떠올릴 뿐이다. 그 시간은 이미 사라졌고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이번 올림픽 개막식을 보니 왠지 그 시간이 다시 온 듯 가깝다.

겨울의 추위가 잠시 물러간 평창의 하늘 밑,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를 응용한 군무와 퍼포먼스는 웅장함 그 자체였다. 특히 인면조와 백호의 출연은 신기하고 자랑스러웠다. 빛이 솟구쳐 별자리가 되어 에워싸는 장면에서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입체를 평면의 방식으로 인식하는 인간의 시각적 한계를 뛰어넘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증강현실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접목해서 만들었다는 해설에 제 삼의 눈이 생긴 듯 황홀했다. 메밀밭을 흐르는 달빛을 따라 아이들의 꿈이 펼쳐지고, 모두가 소통하는 조화로운 세계를 꿈꾸며 밤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미디어 링크, 드론으로 만든 오륜기는 성큼 우리 곁으로 온 미래 기술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피겨 여왕 김연아가 점화한 불꽃을 마지막으로 성화는 긴 여정을 끝마치고 활활 타올랐다. 또한, 개막식의 막바지, 도깨비 난장을 보여준 저스트 절크 팀의 몸놀림은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온 우리 민족의 신명을 펼치는 장이었다.

두 시간여의 개막식 행사 중에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시간의 문’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였다. 수백 개의 사각 화면으로 쪼개진 시간을 다양하게 움직이면서 펼친 공연은 디지털 기술의 집약체처럼 보였다. 언젠가 봤던 영화, 인터 스텔라에서처럼 인간의 시간을 형상화하고 가시화한 것처럼 보였다. 각각 다른 화면이 송출가능하다는 사각의 엘이디 판은 시간을 쪼개듯 흩어졌다가 모이고 다시 흩어져 서로 다른 시간을 표현했다. 내가 그동안 관심을 기울이던 시간의 개념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더욱 벅찬 마음으로 지켜봤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축에서 사는 인간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차원, 태어남을 기점으로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하는 숙명 같은 것, 빛의 속도로 나아가야 비로소 멈추는 상대적 개념,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할 때 그리는 일정한 경로인 궤도가 아니던가.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나임을 알지만 그래도 번번이 나는 시간을 초월하고 싶은 인간적 욕망에 사로잡히고 만다. 광자니 양자 역학이니 입자이면서 파동이니 하는 과학적 이론을 차치하고 그냥 스쳐가고 흐르는 시간, 공간 속에서 부서지고 쪼개지고 흩어져 존재하는데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아닐는지 생각한다.

육체를 가진 이상 빛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기에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공상, 상상, 이야기 속에서 시간은 한낱 자그마한 장치에 불과한 경우가 많고,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것이 생각의 속도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또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상상을 보태 생각을 펼치는 것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끔 세상은 어제와 같고 나만 혼자 달라지고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노랫말을 들으며 시간의 속성을 생각한다. 시간의 오묘함과 비밀을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성큼성큼 내 곁을 떠난다. 이렇듯 절대적이란 형용사와 상대적인 꾸밈말이 함께 어울리는 낱말이 시간이다. 문득 시간이 멈춘다면 아니, 인간이 사는 차원을 벗어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상상하기도 한다. 언젠가 꼭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거나 혹은 반대로 갇혀 버린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떤 생활을 하는지 SF 소설을 써 보리라.

개막식이 끝난 뒤에도 여기저기 올림픽 소식이 넘친다. 직접 참가한 선수들은 각자의 기록으로 수백분의 일 초를 다툰다. 지켜보는 우리는 금세 잊고 말지만, 그 순간을 몸으로 체험한 선수들에게 그 시간은 다르게 기억되리라. 시간과 기억을 뒤로하고 올림픽은 십칠일 동안의 일정을 마칠 것이다. 모쪼록 안전하고 평화로운 시간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 폐막식 공연이 벌써 궁금하다. 내 인생의 한자락 시간을 떼 내어 멋진 공연을 지켜보리라.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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