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칼진 여인과의 동행 31일
앙칼진 여인과의 동행 31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2.1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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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쌀쌀맞은 여인 같았다. 세찬 칼바람이라도 거들면 금세 앙칼진 여인으로 변하곤 했다. 쌀쌀맞고 앙칼진 그 여인과의 동행은 31일간이나 이어졌다. 여인은 밤마다 문풍지를 울리고, 창문을 뒤흔들고, 전깃줄을 몸서리치게 했다. 여인은 매일새벽 창문과 방문, 대문을 열지 못하게 심술을 부렸다.

드러낸 살갗을 몹시 싫어하는 여인은 맨살만 보면 행패를 부렸다. 행패는 새벽일수록 더 심했다. 온몸을 모자, 목도리, 마스크, 장갑으로 칭칭 감싸듯이 하고 방문을 나서지만 얼음장 같은 여인의 손은 늘 차갑기만 했다. 그리고 여인은 가까이 붙어있기를 즐겨했다. 물 묻은 바가지에 깨알이 붙듯 삼동을 스토커처럼 붙어 다녔다.

매일새벽 대문 앞에서 눈을 흘기며 버티고 서 있던 그녀의 이름은 영하(零下)였다. 그녀는 새벽녘 동행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매서운 눈 흘김도 모자라 팔짱을 끼고 태화강변에서 몇 시간을 함께 지내야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 심술궂게도 때론 영등할매의 딸(세찬 바람)을, 때론 영등할매의 며느리(겨울비)를 불러들이기 일쑤였다. 심술을 감당하기가 힘들어 자동차 속에서 보낸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올해 1월, 울산은 예년보다 추웠다. 그중에서도 1월 26일이 제일 추웠다. 2011년 이후 7년만이었다. 최저기온이 영하 12.4℃를 기록했다. 같은 날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표현이 적절했는지도 모른다. 서울 -17.8℃, 청주 -15.0℃, 대전 -16.2℃, 군산 -12.9℃, 대구 -13.0℃, 부산 -9.9℃…. 각 지역 기상대가 기록한 이날의 기상자료였다.

환경부가 철원평야에서 ‘겨울철 조류 동시센서스’를 실시했다. 두루미가 930마리나 조사됐고, 1999년 조사 이후 최다라고 했다. 한 장소에서 930마리가 조사됐다는 것은 기온하강과 무관치 않다. 조류는 추우면 활동을 멈추고 한 장소에 몰려 지내는 습성이 있다. 두루미도 물가에 함께 있었기에 정확한 마릿수를 셀 수 있었다. 영하기온 31일간, 평균기온 -13.2℃, 최저기온 -25.2℃(26일)…. 철원 한탄강에서 확인된 두루미 집단의 존재가 기온하강과 무관치 않음을 알려주는 철원기상대의 기록이었다.

1월 26일 울산, 삼호대숲에서 숙영한 백로는 5마리였다. 구 삼호교 아래 물에서 숙영한 백로는 41마리, 왜가리는 38마리였다. 두루미의 경우처럼 기온하강과 무관치 않았다. 영하기온 23일간, 영상기온 8일간, 평균기온 -3.3℃…. 울산기상대의 1월 자료였다.

2월의 삼호대숲은 1월과 다름없이 흑백 깃의 겨울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흑색 깃의 떼까마귀와 백색 깃의 백로가 한데 어울려 잠을 청하는 스위트홈인 셈이다. 그들은 같은 장소에서 동침하지만 일어나는 시간과 찾아가는 장소는 제각기 다르다. 매일 출퇴근하는 직장인처럼 물가와 논밭 등 수륙(水陸)으로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떼까마귀는 기온이 내려갈수록, 바람이 세차게 불수록 일찍 일어난다. 백로 역시 추우면 추울수록 일찍 일어난다. 사람과 분명 다르다. 하지만 추위에 약한 백로는 영하의 수은주만 쳐다보는 게 아니다. 잠자리만큼은 같은 장소를 고집하지만 더러 예외도 있다. 영하의 기온이 지속되면 물에 발을 담근 채 노숙하기를 즐긴다. 모방학습을 통한 생존방식이다. 삵과 족제비, 수리부엉이의 공격이 아무리 두려워도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외박을 감행한다. 낮아진 기온은 백로의 외박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다.

1월, 31회 조사에서 누적된 백로류(중대백로·쇠백로)의 개체 수는 총 2천57마리였다. 대숲 숙영이 1천348마리(65.5%), 수중 숙영이 709마리(34.5%)로 조사됐다. 작년 1월에는 백로 1천25마리가 집계됐다. 잠자리를 벗어난 백로는 곧바로 물에 내려앉았지만 물가에서 외박한 개체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이 조사기록에서 올해 1월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훨씬 더 추웠음을 알 수 있다.

백로가 무작정 외박한다는 것은 오해다. 백로의 외박에는 지혜가 숨어 있다. 기온이 수온보다 낮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하고 세대를 이어가며 답습한 지혜이다. 덩치 큰 중대백로 사이사이에 작은 쇠백로가 끼어 추운 겨울밤을 보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월, 떼까마귀와 백로의 이소(離巢) 시간은 평균적으로 해 뜨기 전 35분과 30분으로 각각 기록됐다. 1월 삼호대숲 지역(무거천, 삼호섬)에서는 물총새, 동박새 등 수륙조 44종 8천536마리가 관찰됐다. 그중 아비, 물총새, 물닭 등 수조(水鳥)류는 24종 5천299마리(62.1%)였고, 직박구리, 까치 등 육조(陸鳥)류는 20종 3천237마리(37.9%)로 집계됐다.

지난 2월 6일 명촌천에 백로 100여 마리가 함께 머물고 있는 사실이 사진과 함께 보도됐다. 백로류가 무리를 이루는 광경은 번식기를 제외하고는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울산에서 월동하는 소수 개체의 백로류(주로 중대백로, 쇠백로)는 일반적으로 기온이 하강하면 사람의 간섭과 바람의 영향이 적은 하천의 뚝방 같은 곳으로 몰려드는 습성이 있다. 영하와 31일간이나 동행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자료이다. 현장조사는 말공부가 아닌 발품 팔이라야 가치가 있다. 발품을 계속 파는 이유가 있다. 적은 것에 만족(得小爲足)하면 시의적(時宜的) 자료가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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