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칼럼]더 진화된 울산박물관을 기다리며
[이정호칼럼]더 진화된 울산박물관을 기다리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2.05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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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초부터 대곡박물관에서 ‘조일리에서 만난 고대 울산사람들’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조일리 고분군은 울주군 삼동면 조일리의 서북쪽 구릉에 있었는데, 이곳은 신라와 금관가야가 접경을 형성하는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전시는 ‘조일리 고분군을 주목하며’, ‘금동관을 쓴 조일리 지배자’, ‘고분을 통해 본 고대 조일리’ 등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토기류, 철기류, 금동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4∼6세기의 중소형 무덤이지만 금동관이 4점이나 출토되었다. ‘조일리 굵은고리 금귀걸이’는 경주 황남대총 출토 금귀걸이와 모양이 같다.

이 고분군은 20여 년에 걸쳐 발굴되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199 6∼1997), 울산대학교박물관(1998), 울산문화재연구원(2017) 등에서 단계적으로 발굴조사한 것이다. 이를 통해 목곽묘 91기, 석곽묘 257기, 석실묘 4기, 옹관묘 4기 등이 확인되었다. 여기에서 금동관과 금귀걸이 등 권위와 세력을 나타내는 위세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물들이 출토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김해박물관의 협조를 받아 국립창원(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한 부분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다른 울산 서부지역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양산단층대에 속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국립김해박물관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지를 짚어보아야 한다. 이는 문화재 발굴의 시행 주체가 울산 소재 연구기관이 아니어서 당시의 발굴문화재가 외부로 유출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나마 그것마저도 다행인 것은 울산공단이나 온산공단 등이 처음 조성되던 시기에는 거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은 울산문화재재단과 울산발전연구원 내 문화재센터가 울산지역 매장문화재 발굴을 대부분 주도하고 있다. 울산대학교박물관과 울산박물관도 문화재 발굴과 연구의 역할이 크다.

울산이 매장문화재의 보고라는 시그널은 이미 오래전에 있었다. 지금부터 57년 전인 1961년에 울주군 삼광리 고분이 발굴되었던 것이다. 발굴의 시작은 ‘대부장경호(굽다리 긴 목 항아리)’ 한 점이 신고되면서였는데, 국립경주박물관이 주관하여 150여 기를 발굴했다. 유구는 대부분 석곽묘였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말 그림이 그려진 동물무늬 항아리 등은 국보급 유물로 인정받을 만하다고 한다. 당시 신문에는 현장 사진과 함께 ‘정부 수립 후 최초, 최대의 발굴’, ‘선사시대와 초기 신라의 공백기 메워줄 사료 발견’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삼광리 고분군은 대운산 구릉 경사면에 수백여 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문양이 새겨진 토기와 철제창검, 금환, 곡옥, 지석, 방추차 등 수천여 점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3∼4세기 고대사회 지배계층의 무덤군으로 해석되는 이곳의 발굴유물은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귀속되었다. 당시 발굴단은 고고학계 1세대 권위자들이 총출동했으며, 현장 지휘는 채병서 국립박물관 고고실장이 맡았다.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음에도 고고실장의 행불과 함께 발굴일지 등의 기록물이 동시에 사라져 버려서 뒤늦게 2011년에야 보고서가 나왔다.

불행히도 90년대 이전은 문화재 정책이 매우 열악한 시기였다. 울산은 60년대 초반부터 공단 조성이 문화재 발굴조사 없이 진행되었다. 그 후로도 산업단지 조성, 택지 개발, 도로 개설 등이 숨 가쁘게 진행되면서 문화재 정책은 개발논리와 충돌하면서 졸속처리가 빈번했다. 좀 더 성숙된 분위기 속에 발굴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런 와중에 서생 신암리 유적은 1966년과 1974년에 문화재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되는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90년대까지 발굴된 유물들은 모두 다 외부로 유출되었다.

다행히 울산박물관이 2011년에 개관되어 과거에 유출되었던 유물들이 많이 돌아왔다. 현재까지 울산지역 134곳의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 중 5만여 점이 문화재청과의 협의에 따라 울산박물관으로 귀속 조치된 가운데 현재 4만여 점의 발굴문화재가 울산박물관 수장고로 돌아왔다. 신화리나 입암리에서 나온 구석기시대 유물들도 있고, 청동기시대 유물들은 부지가수다. 온산공단에 매몰되어 버린 연자도에서 나온 유물들도 희귀하다. 이렇듯 다양한 유물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제자리로의 복원은커녕 수장고에서 잠만 자는 신세가 되었다.

땅속의 유물들을 찾는 일은 밤하늘의 새로운 별을 찾는 만큼이나 어렵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그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유구와 유물들이 울산에서 발굴되었다. 매장문화재 밀집도가 국내에서 가장 높은 울산 땅을 헤집고 수없이 많은 구조물들이 들어섰다. 앞으로도 울산 땅의 역사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정부는 반구대암각화를 수장 위험에서 구출해 줘야 한다. 동시에 울산박물관 산업사관을 다시 추진 중인 ‘국립산업박물관’으로 이전시켜서 울산시민들이 수장고에 잠자고 있는 문화재들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

이정호 수필가, 울산학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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