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왜성과 관광자원화
울산왜성과 관광자원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1.31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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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 보수정비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울산시 중구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동상 건립계획을 전격 철회한데 이어 일본식 성문(城門) 복원계획도 철회를 포함하는 전면 재검토에 들어가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중구는 울산왜성 정비사업을 진행하며 정유재란 최대의 전적지라는 역사적 가치성을 지닌 울산왜성을 효과적으로 복원정비해 지역활력화를 도모하고 관광자원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민정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학성공원 입구에 명나라와 조선 장수의 조형물과 함께 왜장의 조형물이 나란히 세워진다는 소식이 보도되자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중구는 통상적으로 역사적 인물을 현양하기 위한 동상이 아니고 조명 연합군에 포위돼 곤혹스러워하는 가토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라며 해명에 나섰으나 여론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중구는 본보의 관련 기사가 보도된 당일 정오 무렵에 왜장 동상 건립계획을 철회했다.

왜장 동상 건립 파동이 잦아들 무렵 이번에는 일본식 성문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문화관광실이 의회에 소관 업무보고를 하며 울산왜성 성문 복원 고증기본계획 및 실시설계 용역을 오는 3월에 실시하겠다고 설명했다.

울산왜성은 정유재란기인 1597년 축성됐다. 그러나 왜군은 축성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공사가 마무리되지도 않았던 성에는 식량과 물이 비축되지도 않았다. 한겨울 맹추위 가운데 벌였던 13일간의 전투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났지만 왜군이 고전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1598년에도 전투는 한 차례 더 벌어졌다. 왜군은 이때도 수성에는 성공하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의를 상실하기까지 이르렀다.

왜군은 그해 11월 성을 불태우고 패퇴했다. 지금에 와서 당시 성내 건축물이나 성문 등 구조물의 원형을 밝혀낼 수는 없다.

제1차 도산성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 있다. 구원군을 이끌고 참전했던 왜장이 일본으로 돌아가 전투장면을 화공에게 구술해 그렸다는 것이다. 그나마 원본은 사라졌고 후에 모사한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몇해전 울산박물관이 이 그림을 사겠다고 나섰지만 시의회가 허용하지 않았다. 울산박물관은 이 그림을 사기 위해 유물구입비를 예년보다 15억원 증액해 예산을 편성했다. 그러나 이 예산안은 시의회에서 전액 삭감됐다.

이 그림에 나오는 울산왜성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 울산왜성은 정상부의 본환(本丸)과 동북부의 이지환(二之丸), 서북부의 삼지환(三之丸)이 주를 이룬다. 이지환은 본환보다 낮고 삼지환은 이지환보다 낮다. 그러나 도산성전투도에는 성곽이 뚜렷하게 4부분으로 표현돼 있다. 울산왜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남의 기억을 전해 듣고 그린 그림의 한계이다.

상황이 그러할진대 성문을 포함한 건축물의 원형을 고증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성문을 설치한다면 현재 일본의 성문들을 조사해 그 가운데 적당한 대상을 찾고 그와 비슷하게 설계해 건립하는 데 그칠 뿐이다. 역사성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울산왜성은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축성했다. 왜군이 이 성을 사용한 기간은 채 1년이 되지 못한다. 성을 불태운 것도 왜군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성벽도 많이 허물어졌만 왜성이었음을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남아 있는 성벽이 배부름 현상 등으로 붕괴될 위험이 있는 곳 정도를 정비하는 일은 중구가 당연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형이 분명하지도 않은 구조물들을 복원하는 일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울산왜성에 왜군은 1년 정도 머물다 돌아갔다. 그 밖의 세월은 우리가 활용했다. 한때 왜성이었던 곳이다. 영원히 왜성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강귀일 취재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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