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칼럼]아직도 안 걸어보셨나요? 넓적부리의 호반을…
[김성수 칼럼]아직도 안 걸어보셨나요? 넓적부리의 호반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1.28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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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면 매일 수면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녀석이 있다. 선암호수공원의 행위예술가 ‘넓적부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넓적부리는 부리가 넓적하다 해서 붙여진 오리 이름이다. 신체적 특징은 부리가 크고 넓적하고 길어 청둥오리나 흰뺨검둥오리 등 다른 종의 조류와 쉽게 구별된다.

넓적부리는 잠수를 못하는 수면성(水面性) 오리로 먹이활동을 물위에서 한다. 쇠오리, 알락오리가 수면성 오리류에 속한다. 넓적부리는 야생에서 쉽게 관찰되지 않는 종이지만 선암호수공원에서만은 지척에서 관찰할 수 있다. 우스꽝스러운 부리의 생김새와 먹이활동 시의 특이한 행동은 산책객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매력이 보통이 넘는다.

머리는 때때로 물속에 처박아 잘 보여주지 않지만 꽁지만큼은 원 없이 보란 듯 물구나무서기로 보여준다. 이들은 항상 수십 마리의 무리를 형성한다. 형성된 무리는 신기하게도 수면에서 한쪽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돈다. 천천히 그리던 원은 서서히 빠르게 뱅글뱅글한 맴돌이로 발전한다. 이때 맴돌이를 눈여겨보면 언뜻 보아도 알 수 있는 특이한 행동이 느껴진다. 부리를 물속에 담그고는 쩝쩝거리는 행위를 자꾸만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를 왜 반복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면 바로 과학자가 된다. 이들이 무리를 지어 물위에서 맴돌이를 하는 것은 물갈퀴로 물속에서 소용돌이를 일으켜 먹이를 떠오르게 하기 위한 행동이다. 속도가 붙은 소용돌이는 수중에 가라앉으면서 이들의 먹이가 되는 수초, 수서곤충, 플랑크톤 등을 물위에 떠오르게 한다. 떠오른 먹이는 넓적한 부리를 좌우로 움직여 걸러내며 먹는다.

이러한 먹이행동은 다른 종에서 쉽게 관찰되지 않는 것으로, 넓적부리 특유의 천성이자 대를 이은 모방행위인 것이다. 넓적부리의 맴돌이는 집단협업을 통해 깨우친 지속가능한 생존전략인 셈이다. 과거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쌀을 이는 조리질이 넓적부리의 먹이행동을 벤치마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야생의 넓적부리를 관찰하기는 쉽지 않다. 접근하는 사람이 있으면 민감하게 반응해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부터 매주 한 번씩 선암호수공원을 찾고 있다. 같은 요일과 시간을 정해두고 이곳에서 서식하는 조류를 관찰하고 조사하기 위해서이다.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서 조류의 행동양태를 모니터링(monitoring)하고 있다. 이는 매년 겨울철에 발생되기 쉬운 AI를 미리 차단하기 위한 선제적 방역의 기초자료를 얻기 위한 일이다.

현재까지 조사를 8차례에 걸쳐서 했다. 그 결과 조류는 총 41종 3천212마리가 관찰되었다. 그중 우점종(優占種, dominant species) 랭킹 1위는 ‘물닭’으로 790마리(24.6%)가 조사됐다. 그 다음은 흰뺨검둥오리 564마리(17.6%), 넓적부리 371마리(11.6%), 직박구리 188마리(5.9%), 참새 151마리(4.7%) 순이었다. 이러한 조사는 사람과 철새가 공존하는 친수공간인 선암호수공원의 이용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데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선암댐’, ‘선암저수지’ 등으로 부르던 현재의 선암호수공원은 1962년 울산시 승격에 때맞추어 ‘산업기지개발공사(현 K-water)’가 진행한 사연댐 축조, 낙동강계통 공업용수 도수설비 준공 등 80여개 사업 중 하나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당시 저수지의 용도는 석유화학공단에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것이어서 시민들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 뿐 접근이 금지된 구역이었다. 그러다가 선암댐이 시민들에게 공개된 것은 2004년 1월의 일이었다.

2005년부터는 남구청과 한국수자원공사가 서로 손잡고 저수지 주변에 산책로와 편의시설, 휴게공간, 주차장을 조성하면서 선암댐은 도심 속 생태공원으로 변모되어 갔다. ‘선암호수공원’이란 이름은 실개천, 억새밭이 어우러진 습지가 점차 자연생태학습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고 기존의 도시자연공원이 근린공원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2010년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는 선암호수공원은 유역면적이 1.2㎢, 산책로 길이가 약 4㎞이다.

넓적부리가 동그라미를 그리는 모습을 눈여겨볼 때마다 ‘조신의 꿈(調信之夢)’ 같은 상념에 잠기곤 한다. 친근한 노랫소리가 귓전에 나지막하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윤연선, ‘얼굴’)

잠깐의 환몽(幻夢)은 남가일몽(南柯一夢)으로 깨어나 허전하다. 부질없는 마음을 숨기려고 애써 앙증스러운 쇠물닭으로 시선을 옮겨 외면해보지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박인희, ‘세월이 가면’) 연이어 밀물처럼 밀려드는 뭇 추억에 나를 맡긴다. 그때마다 ‘삐죽∼ 삐죽∼’ 직박구리는 생로병사가 생성·변화·소멸로 순환된다는 진리를 일깨워 주는 듯 헛웃음으로 대답한다. 선암호수공원 10리길 산책로를 걸으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착각에 빠져든다. 까마귀는 오호, 까치는 희작, 직박구리는 삐죽, 멧비둘기 구구 하는 친수공간 선암호수공원 산책길이다.

지금 묻고 있습니다! ‘아직도 안 걸어보셨나요? 동그라미 얼굴 그리는 넓적부리가 있는 호반, 선암호수공원의 힐링 10리 산책길을….’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조류생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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