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 메모]고래광장의 매화는 아직 피지 않았네
[굿뉴스 메모]고래광장의 매화는 아직 피지 않았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1.21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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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필자는 울산대교를 굽어보는 장생포의 단골 횟집에서 일행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바로 앞 선착장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두 명의 강태공이 작은 휴대용 버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잠시 후 라면을 먹나 했더니 홍합탕을 끓인 모양이었다. 홍합껍데기가 그 옆에 널브러져 있었고, 술이 좀 취한 아저씨는 바다를 보며 바지춤을 내리더니 생리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우리는 회덮밥과 매운탕을 맛나게 먹고 난 후 잠시 짬을 내 고래문화마을에 들렀다. 월요일이 쉬는 날인 줄 모르고 찾아온 관람객들에게 정기휴무라고 말해줬더니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고래광장에 오르면 장생포 새해맞이 해돋이 행사장이라 전망이 좋다고 했더니 순순히 내 말대로 따랐다.

고래문화마을에서는 3월 말 완공하는 모노레일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모노레일은 고래박물관을 출발해 고래문화마을과 5D입체영상관을 거쳐 다시 박물관으로 순환하는 레일로, 1.3㎞ 노선에 8인승 차량 5대가 운영된다고 한다. 지금은 고래전기차가 시간마다 운행하지만 많은 인원을 태울 수 없어 아쉬웠는데 모노레일이 개통되고 나면 고령자나 장애인들의 불편을 한꺼번에 덜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미완성이어서 기존 시설과 불일치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완성이 되고 운행이 시작되면 탑승자나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나 서로 반기며 신나게 손을 흔들어주는 명물이 될 것이다.

나는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기분 좋게 고래광장으로 향했다. 고래광장에 오르니 추운 겨울이 슬슬 물러날 채비를 하는지 바람이 차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고래문화마을을 개장할 때 기념으로 심었던 나무는 그대로였지만 그 곁의 매화는 아직 꽃피울 낌새가 전혀 안 보이는 듯했다. 아직 봄이 오기에는 시간이 이른 탓일까. 모노레일 공사를 하는 인부들은 그곳에도 있었고, 포클레인이 요란한 엔진 음을 울리며 바쁜 일손을 거들고 있었다.

나는 고래조각공원에 우람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는 대왕고래와 범고래·혹등고래·밍크고래의 모습을 차례로 카메라에 담았다. 울산대교의 주탑이 잘 보이도록 위치선정을 하면서 수 십 컷을 누르고 또 눌렀다. 거리가 먼 울산대교전망대가 손톱만큼 작아 보였다. 조만간 다시 찾아올 때 물오른 매화나무 가지 끝에는 탐스런 꽃봉오리가 ‘찾아주어 고맙다’며 반갑게 인사를 하겠지.

70~80년대 장생포 옛 마을의 모습을 간직한 고래문화마을에서 나는 고단에 지쳐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낸다. 날마다 부두에서 무거운 짐을 내리고 또 내리는 고생이 끝나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그 돈으로 자식 키우기가 너무도 힘들었기에 술의 힘에 기대려고 하셨던 것일까.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의 양말을 벗긴 다음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그 발을 씻어 드리던 어린 막내는 어느덧 중년의 로맨스그레이가 되어 아버지를 회상한다.

아버지보다 자식들을 더 아끼셨던 어머니는 머리에 떡 소쿠리를 이고 용연 바닷가 끝자락까지 다니며 행상도 하셨고, 진양화학이나 동양나이론 공장 같은 곳의 하청 일을 떠맡아 억세게 일하기도 하셨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산업화의 기치 아래 힘든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부모님 세대들의 노고는 하늘이 알고 땅도 알 것이다. 삼천리자전거를 타고 부두까지 출퇴근하셨던 아버지와 척박해도 일거리가 있어 다행이라며 맞벌이를 감당해내셨던 어머니의 고단한 노동이 자식들을 먹여 살리지 않았던가.

집집마다 자식이 많아도 누나나 형들이 어울려 놀아주고 동생들을 챙기며 부모 대신 키워내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 시절에는 감히 꿈도 못 꾸던 부유한 삶의 여건들이 지금은 넘쳐날 정도인데 어찌하여 그때나 지금이나 다들 인생살이가 힘들다고 하소연만 하는지 안타깝다. 이틀 내리 겨울비가 내려 대지를 적신다. 이제 이 비가 멎으면 겨울이 지나가고 곧 봄소식이 들려오겠지.

박정관 굿뉴스울산 편집장 중구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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