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속의 숨은 그림들
공원 속의 숨은 그림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1.2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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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학성공원을 다시 찾았다. 지인이 건네준 SNS메시지가 발길을 옮기게 했다. 특히 메시지 속의 ‘동영상’ 한 컷은 공원 속의 숨은 그림 하나를 풀어주게 될 맞춤열쇠나 다름없었다. “1931년 교토 제일고등여학교(현 교토 오키고교) 학생들의 만주·조선 수학여행 영상물 가운데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울산의 동헌과 객사, 울산왜성, 태화강의 당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학성공원 견학 장면도 나옵니다. 그 장면에서 본환지(本丸趾), 이환지(二丸趾), 삼환지(三丸趾) 표지석이 보입니다.”

자물쇠는 학성공원의 ‘표지석’이었다. 영상물에 보이던 공원 꼭대기의 본환(本丸), 가운데층의 이지환(二之丸) 표지석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었고, 맨 아래층의 삼지환(三之丸) 표지석인 ‘三丸趾’(삼환지) 하나만 시야에 잡혔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가로 21cm, 세로 21cm, 지상높이 75cm의 표지석. 글씨 모양은 영상물 속의 그것을 쏙 빼닮았다. 하지만 받침돌은 땅속에 묻혔는지 대답이 없었다.

얼마 전 지인과 나눈 대화는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말의 ‘터’를 뜻하는 한자 ‘-지’는 보통 ‘址’자를 쓰는데 삼지환의 표지석엔 ‘趾’자가 쓰여 있다. ‘배를 대던 곳’(선착장)을 뜻하는 선입지(船入址)는 ‘址’자를 썼는데 그런 식으로 하자면 ‘三丸趾’의 ‘趾’는 잘못 쓰인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궁금증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교토 제일고녀 수학여행 동영상’이 맞춤형 열쇠였던 것. 일한(日韓)사전을 뒤져 봤더니 일본에선 두 가지(址·趾)가 모두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三丸趾’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시각에서 새기고 세운 게 분명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선봉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지시로 축성한 학성공원 속의 ‘울산왜성’이 그들에겐 소중한 유적지의 하나였을 테니까….

공원을 둘러보는 과정에 ‘숨은 그림’ 여럿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석조물(石造物)의 건립 시기에 얽힌 얘기들로, 흥미로운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학성공원의 전신 ‘울산공원’의 기증자 김홍조 공덕비(故金公弘祚功德碑銘, 울산군 울산면 건립)는 ‘소화(昭和) 3년 9월’ 즉 1928년 9월에 세웠으니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그 다음 ‘대한광복회총사령 박상진의사 추모비’(박상진의사 추모사업 울산군위원회 건립)는 ‘단기 4293년 8월 15일’에 세웠으니 4·19 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 광복절 날의 일이다.

‘봄편지 노래비’와 ‘울산광역시민헌장’은 또 다른 흥미를 선사했다. 글씨마저 보기 힘든 노래비 하단의 동판(銅板)을 유심히 살폈다. “서덕출(1906∼1940) 님의 대표작 봄편지”로 시작되는 비문(碑文)에는 “이제 신시 60돌을 기념하여 이후락 님을 비롯한 뜻 있는 분들의 정성으로…”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었다. 1968년 10월 9일이면 5공실세 이후락(HR, 1924 ∼2009) 씨가 칩거하던 시절일 터인데 고향 선배를 위해 흔쾌히 일조했다니 묘한 느낌이 엄습했다. ‘새싹회 후원, 백문기 제작’에 ‘울산문화원 노래비 건립위원회’가 세웠다고 했다.

이날의 압권은 뭐니 해도 ‘울산광역시민헌장’이었다. 광역시로 승격되던 1997년 7월에 세웠겠지 하고 뒷면을 살피니 그게 아니었다. 세운 때는 1975년 6월 1일, 세운 이는 ‘울산시장 원병의’였다. ‘이 비를 세우면서’란 머리말 아래엔 다음 글이 새겨져 있었다. “조국 공업입국의 기적을 마침내 이룩했노라. 우리에겐 영광, 그리고 번영이 있으리! 오늘 첫 시민의 날을 맞아 한 마음으로 이 헌장을 새겨 유서 깊은 학성의 옛 터에 이 비를 세우나니, 다 함께 슬기를 모아 우리의 소망을 이룩하리라.” 네모반듯한 시민헌장 비의 뒷면은 처음 그대로 두고 앞면만 ‘판 갈이’ 했다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공원 속의 숨은 그림들은 이밖에도 더 있었다. 숱하게 찾아낸 숨은 그림들은 지면이 허락할 때 다시 한 번 공개할 생각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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