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경의 여행스케치]꿈의 여정 ②…시베리아 횡단 열차
[김윤경의 여행스케치]꿈의 여정 ②…시베리아 횡단 열차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1.1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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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 열차에는 식당 한 칸과 각 차량마다 3층 침대나 2층 침대가 양쪽으로 놓인 쿠페(coupe)가 있다. 앞에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사모바르(samovar ; 찻물을 끓일 때 많이 쓰는 금속주전자)와 세면실이 있고 작은 차장실이 있다. 차장들은 객차에서 2명이 교대로 근무하며 객실 청소와 분위기 정리를 한다. 늘씬한 러시아 미인이 아닌 뚱뚱한 중년의 여성들이다. 그들은 표정도 없고 친절한 편이 아니라서 눈이 마주칠까봐 두려웠다.

양끝에 있는 화장실 문을 열면 양철로 된 변기 커버는 녹이 슬었고 내부도 찌든 때로 얼룩져 있다. 세면기는 손가락으로 윗부분을 누르고 있어야만 물이 나온다. 머리를 감을 때는 골프공으로 구멍을 막아서 하거나 페트병에 받아 바닥에서 감아야 한다. 샤워는 나흘 동안 엄두도 낼 수 없다. 이 문화 충격으로 호들갑을 떨지만 우리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시차는 2시간 정도 나지만 9시가 넘어야 해가 지는 백야(白夜) 현상이 있다. 11시가 넘어서 밤이 된 대지를 기차는 덜컹거리면서도 빠르게 달리고 황무지(荒蕪地)는 끝도 없이 나온다. 아래 침대에 누워 있으면 말을 탄 느낌이다. 기차의 거칠고 힘든 숨소리와 바람소리가 온 몸으로 느껴진다. 밤새 달려온 기차는 간이역에서 물 공급을 받기 위해 잠깐씩 멈추었다 다시 가기를 반복한다.

새벽녘에 기차는 하바롭스크 역으로 들어왔는데 30분간 정차한다. 힘들게 달려온 열차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바롭스크는 우수리강과 아무르강(흑룡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도시다. 극동의 중심지로 독립군의 활동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역 앞에 키 작고 배 나온 레닌 동상이 있다.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옛 소련 땅임을 실감나게 한다.

마침내 러시아를 대표하는 자작나무 숲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앞은 코팅된 것처럼 반짝거리고, 뒤는 하얀색으로 바람에 앞뒤로 흔들리면 은색 물결이 일어난다. 가장 아름다운 때는 가을로 황금색으로 변해 러시아에서는 9월을 ‘황금가을’이라고 부른다.

자작나무는 똑같은 모양의 인형이 크기가 달라 열면 안에서 자꾸 나오는 마트료시카(matryoshka) 인형을 만든다. 뿌리는 껌의 원료인 자일리톨(xylitol)로도 쓴다. 줄기는 허물을 벗은 듯하고 눈을 뒤집어 쓴 것 같기도 하다. 멀리서 본 자작나무 숲은 이쑤시개를 꼽은 듯하고 더 먼 곳은 둔덕에 흰 갈기가 쭈뼛쭈뼛 서 있는 느낌을 준다.

기차는 한없이 달리고 들판은 무인지경(無人之境)으로 태곳적 초지와 습지, 숲이 어우러져 있다. 들판만 보노라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미개지 원시림(未開地 原始林)을 보고 일행들이 똑같이 개발을 꿈꾸는 소리를 해서 한바탕 웃었다. 과연 ‘새마을 정신’을 수출할 만한 민족이다.

수평선 일출은 자주 봤지만 지평선에서 해 뜨는 모습은 처음인데 가히 장관이라 할만하다. 천지에 어둠이 걷히면서 사방이 붉어지더니 어느 틈엔가 해가 지평선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해가 지고 금방 뜨니 아쉽게도 긴 복도에는 한 사람도 나와 있지 않았다. 공감할 사람이 없어 안타까웠지만 깨울 수가 없었다.

며칠을 기차 안에서만 있으니 서서히 지쳐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복도에 나와 말을 건네는 사람, 보드카를 들고 방마다 도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50도가 넘는 보드카의 적정도수를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멘델레예프가 니콜라이 2세 때 40도로 규정했다. 보드카는 목에 넘어가는 순간 강렬함이 식도를 타고 전율을 느끼게 했다. 호기심에 홀짝거리다가 점점 몸이 녹아 없어질 것 같았지만 매일 먹다보니 나중에는 조금 무감각해지는 듯했다.

간이역에서 러시아 사람 몇 명이 탔는데 그들에게서 자작나무 냄새가 났다. 창밖에는 널빤지 울타리가 있고 뾰족한 지붕에 삼각형 모양의 작은 집들이 평화롭게 보였다. 이내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에는 잔잔한 야생화가 알록달록하게 피어 인상주의 그럼처럼 펼쳐졌다. 숲과 풀밭 사이로 간간이 시냇물이 흐르고 계란 같은 개망초 꽃을 보니 어린 시절 고향 들녘 같아 반가웠다.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자다가 책을 읽다가 창밖을 응시한 채 딴 생각에 빠지곤 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지루함을 가장 잘 견디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밤에는 한 방에 모여 음식을 잔뜩 놓고 수다를 떨었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겠지만 처음 뭉친 팀이라 러시아만큼 서로를 잘 모른다. 뭐든 새로움을 알아가는 기쁨, 그래서 여행은 몸으로 하는 즐거운 독서이다. 지금도 ‘미카’가 생각난다. (계속 이어짐)

김윤경 여행가, 자서전쓰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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