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인국의 거인들
소인국의 거인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1.1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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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국에서 거인들은 언제나 부담스런 존재다. 무엇보다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해야 한다. 그가 엄청 착한 거인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자칫 아무 생각 없이 걷거나, 앉거나, 혹은 팔을 흔들었다가는 주변에 있는 소인들은 소리 소문도 없이 골로 갈 수가 있다.

필시 그 거인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올 것이다. “거기 있는 줄 몰랐어.” 조금 못된 거인이면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내 몸뚱어리 하나 내 마음대로 못 움직여!?” 하지만 살인이나 과실치사나 고의성에 따라 형량은 다르지만 누구 하나 죽어 나가는 건 결국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서도 배가 난파당한 후 소인국에 도착한 걸리버는 혹시나 주변의 소인들이 다칠까봐 엄청 조심한다. 왜냐? 소인국에서 거인들은 존재 자체가 이미 죄인일 수 있거든.

그런데 우리 울산 노동계에도 그런 거인들이 있다. 울산, 아니 대한민국 전체를 대표하는 노동계 대표주자인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노조가 바로 그들. 전자가 5만1천여 명, 후자는 1만2천여 명의 조합원들을 자랑한다. 둘은 분명 소규모의 부품 협력업체들에겐 거인이다. 굳이 부품 협력업체가 아니어도 지역 경제라는 게 경기(불경기)라는 동맥으로 서로 얽히고설켜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업종과 관계없는 자영업자들에게도 둘은 분명 거인이다. 소인인 부품협력업체나 자영업자들은 이들 두 거인들의 생각 없는 움직임으로 인해 가끔 픽픽 쓰러지곤 한다.

물론 사측인 현대차나 현대중공업도 거인이다. 그들로 인해 다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언제부턴가 울산에서는 두 회사의 노조활동에 의해 다치는 소인들이 부쩍 늘고 있다.

현대중공업만 해도 2016년 임단협이 여태 타결되지 않으면서 특히 동구 경제는 초토화된 지 오래다. 사측도 책임은 있겠지만 지난 9일 거의 2년 만에 어렵사리 마련한 잠정합의안이 조합원 투표에서 부결되는 모습을 보자니 한 숨이 절로 나오더라. 지금 동구엔 현대중공업의 협상 타결을 촉구하며 시민들이 만든 현수막들이 동네 구석구석까지 내걸렸고, 불황에 지친 상인들의 신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며칠 전까지 현대차의 상황도 비슷했다. 지난달 19일 극적으로 마련한 지난해 임단협 첫 잠정합의안이 며칠 뒤 치러진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부결되면서 부품 협력업체를 비롯한 지역 소인들은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는 더 살벌했다. 해가 바뀌자 연초부터 노조가 5일 연속 부분파업을 선포하면서 소인들은 잔뜩 겁에 질렸었다. 거인의 움직임이 더욱 격해졌기 때문. 다행히 2차 잠정합의안이 며칠 전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과하면서 소인들도 이젠 안도의 한 숨을 내쉬게 됐다.

물론 현대중공업이나 현대차 노조도 그 동안 주변 소인들에 대해 할 말은 있었을 테다. 아마도 둘 중 하나였겠지. “거기 있는 줄 몰랐어”나 “내 몸뚱어리 하나 내 마음대로 못 움직여!” 하지만 소인들을 걱정한 언론의 집중질타를 감안하면 전자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사실 <걸리버 여행기>는 아동문학이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소인국에서 거인이었던 걸리버는 얼마 후 거인국에 가서는 소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결론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는 것. 그러니까 잠정합의안에 부결을 찍었던 현대차나 현대중공업 조합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나중에 퇴직하고 나면 그대들도 자영업자 같은 소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이다. 투표의 자유를 방해하고 싶은 뜻은 전혀 없다. 다만, 결국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우리 모두를 함께 구원할 것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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