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우리 동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1.15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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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 일부러 집에서 조금 먼 큰길 가에서 택시를 내렸다. 불콰한 낯을 식히고 바람을 맞으며 걸을 작정이었다. 건널목 보도에 서서 초록 신호를 기다리는데 어딘가에서 클래식 음악 소리가 들린다. 성능 좋은 스피커인지 한껏 볼륨을 높였음에도 잡음이 없다. 정확한 음을 연주하는 현악기 소리는 허공을 꽉 채우고 내 귓가를 맴돌다가 거리로 내려와 흐른다. 첼로와 바이올린 소리에 연이어 클라리넷, 호른 소리가 이어 나온다. 제목은 모르지만, 귀에 익은 음악이 뒤를 이어 연주된다. 웅장한 분위기의 절정에서 팀파니와 심벌즈가 크게 떨고 덩달아 내 가슴도 뛴다. 유명한 음악 홀에 앉아 교향곡을 듣기라도 하듯 황홀한 순간이다.

어디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소리를 찾아 다가선다. 주변은 온통 깜깜하다. 길가의 상가도 문을 닫고 빛도 보이지 않는다. 소리가 나는 곳은 역시 깊은 어둠 속이다. 그물망 셔터가 내려간 곳이 음악의 진원지다. 가게 안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가게 한쪽에 세워 놓은 스피커가 보인다. 눈을 들어 상호를 확인한다. 타이어 가게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낮에도 어렴풋하게 음악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우체국을 다녀오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에는 왜 이렇게 큰 음악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자동차에만 사각지대가 있는 게 아닌 게 분명하다. 음악 소리에 끌려 건널목 신호를 몇 번 놓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에 나는 이곳을 우리 동네 음악 홀이라고 여기고 자주 들러 음악을 듣는다. 굳이 주인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는다. 그저 언젠가 타이어를 사거나 교체할 일이 생기면 꼭 이 가게로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지나다닌다.

우리 집 단지 내 상가에는 신용협동조합, 편의점, 김밥집, 독서실, 병·의원, 골프 연습장, 미용실 그리고 약국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느 날, 약국 앞에 현수막이 걸렸다. 임대를 알리는 문구 옆에 업종 변경이 가능하다는 글자도 함께 보였다. 집 근처지만 발길이 잦지 않았던 곳이었다. 언젠가 병원을 다녀온 후 처방전을 들고 갔을 때, 취급하는 약이 아니라며 처방전을 다시 돌려받은 후 나는 거의 우리 동네 약국을 이용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쌍화탕이나 일회용 응급 밴드를 사러 갔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왠지 친했던 이웃이 이사를 가는 것처럼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옆 아파트 상가의 치킨 전문점이 문을 닫은 후 가볍게 한잔할 곳이 사라져 아쉬웠던 기억도 났다. 병원 근처의 대형 약국만 이용한 내 탓이라고 괜히 자조 섞인 한숨을 쉬었다.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일부러 약국에 들렀다. 평상시 모습보다 왠지 허름한 모습의 실내, 두 개의 쌍화탕 중에 더 비싼 생강 쌍화탕 한 상자를 사고는 약사에게 약국의 존폐를 물었다. 약사를 구하는 중이라는 대답. 언제까지 문을 여냐는 것을 물어보려는 찰나, 약사에게 전화가 오는 바람에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없어지면 안 되는데…….” 약국 문을 나서면서 중얼거리는 내 말을 약사가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동네에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대형할인점뿐만 아니라 재래시장이 가까워야 하고, 편의점도 하나쯤 있으면 좋고, 빵집, 미용실, 분식집, 떡집, 우체국, 은행, 병원, 학교, 관공서 따위가 다 필요하다. 이 중에 하나라도 가까이 없으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살기 좋은 동네는 가까이 이런 편의시설이 옹기종기 모인 동네일 것이다.

우리 동네는 다행히 걸어서 갈만한 곳에 거의 다 있다. 초등학교가 두 곳, 중·고등학교도 가깝다. 주민자치센터도 멀지 않고 주변에 상업시설보다 주거시설이 많아 조용한 편이다. 마을버스를 비롯한 버스 노선도 비교적 많고 편리해서 이 동네로 이사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지난봄쯤, 예쁜 커피숍도 들어섰다. 커피숍 덕분에 어두침침한 거리가 늦은 시간까지 환하다. 밥을 먹고 뒤풀이 장소로도 좋고, 집에서 가까워 부담 없이 차 한잔하기에도 알맞다. 오후의 햇볕을 쬐며 느긋하게 앉아 달콤 쌉싸름한 커피를 마시노라면 프루스트가 고심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듯 여유롭다.

약국 창을 가린 현수막은 몇 주가 지난 오늘도 여전하다. 아무래도 약국이 없어지지 싶다. 빛을 잃어가는 현수막 천처럼 우리 동네도 흐릿해지는 것은 아닌지 씁쓸하다. 이러다가는 내가 좋아하는 거리 음악 홀도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퇴근한 남편을 붙잡고 이참에 타이어를 갈자고 부추긴다. 저녁을 먹고 동네 마실이나 가자며 남편 손을 이끈다. 건널목을 걷는 내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건널목 중간에 닿자 어김없이 음악 소리가 들린다. 박자에 맞춰 남편이 고개를 까닥인다. 이제 더는 우리 동네 지도가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 음악이 나오는 타이어 가게가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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