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경의 여행 스케치]꿈의 여정 ①
[김윤경의 여행 스케치]꿈의 여정 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1.1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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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여행은 많은 설렘과 추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낭만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예전에 본 ‘닥터 지바고’, ‘안나까레리나’, ‘제독의 연인’ 등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에는 하얀 눈 속에 증기를 뿜어내는 기차가 있다. 지금은 증기 기관차는 아니지만 아직도 그 철로를 가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긴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있다. 전구간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천288km로 기차 안에서 8일간 머문다. 우리 일행은 그 중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카림스카야-울란우테-이르쿠츠크 구간 4천206km로 3박4일, 72시간을 탄 후 바이칼 호수로 갔다.

바다와 인접해 있는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 역사와 밀접한 곳으로 ‘연해주’라고 불렀다. 거의 버려진 땅이었을 시절에 조선의 정치 불안과 빈곤으로 한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했다. 1863년 최초의 한인촌이 생겨나서 1870년대 8천400명으로 집계된 수가 1923년에는 1만2천명까지 이르게 되었다. 1910년 강제병합 무효 선언을 하고 강력한 반일운동을 벌였던 한인들이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곳이기도 하다. 1929년 포세에트 항구 한인 마을은 한인 극장과 문화회관은 물론, 한인 자치기관을 두고 있었으며, 행정기관에서는 한글을 사용하는 등 한인 정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했다고 한다.

1937년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강제이주 명령에 의해 2차례에 걸친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가 집행되면서 그 일대의 고려인 동포들의 한과 설움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1999년 8월 한민족연구소가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기리고, 러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신한촌에 기념비를 설립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현재 우리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우리나라와 친숙한 이사벨라 비솝 여사는 명저(名著)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연해주나 만주의 한인들을 보면 조선인은 본래 강인하고 성실하다. 본토의 조선인이 궁핍한 것은 탐관오리가 득세하고 정부가 무능한 탓이다. 나라가 제 기능을 한다면 조선은 나중에 일본보다도 더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는 우리 한인 이주민들이 동토(凍土)의 땅에서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삶을 개척해 나갔는가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거리에는 우리나라에서 중고로 구입한 대우, 현대차가 시내버스로 돌아다니는데 가끔 한글 표지도 안 뗀 버스가 그냥 다닌다. 하단 가는 버스도 있고, 청량리역에 가는 버스도 있어 우리나라인 듯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발역이자 종착역이다. 기차역 맞은편 혁명광장에는 3개의 동상이 있다. 동상들은 소련을 위해서 싸운 병사들을 기리고 있다. 광장이 굉장히 넓고 여기저기 사람들이 쉬는 공원으로 유명한 약속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옆에 잠수박물관 중앙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과 대서양 전선에서 큰 전과를 거둔 C-56 잠수함 1대가 전시되어 있다. 참전 기념비와 별모양 안에 올림픽 기간의 성화처럼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 ‘영원의 불’이 있다. 나중에 보니까 러시아 대도시 어디에나 꺼지지 않는 불꽃과 전쟁기념비가 있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예우를 확실히 하고 언제나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불꽃의 뒤편으로는 전사자 명단이 동판에 새겨져 있는데 김, 박도 보인다. 우리 조상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바다에서 극동함대가 정박해 있는데 게임이나 영화에서 보던 군함들이 즐비하게 떠 있어 이채로웠다.

작지만 예쁜 문양과 화려한 색깔로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는 개선문 위로 올라가면 고리키 극장 사거리가 나온다. 왼쪽으로 틀면 유적으로 지정된 바로크 양식의 굼 백화점 방향이다. 홍대 거리 같은, 젊음의 거리 아르바트 거리는 우리나라 KT에서 조성해준 거리로 ‘KT 거리’라는 별칭이 있다. 불현듯 지명을 보니 청춘 때 서울 골방에서 읽은 ‘어머니’를 지은 막심 고리키가 생각난다. 그 책 속에도 아르바트 아이들의 모습이 나왔던 것 같다.

차는 막히고 시간이 촉박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독수리 전망대를 가보지 못한 채 뛰어 기차역으로 갔다. 역사(驛舍)는 러시아 혁명 전에 지어진 건축물 중 아름답기로 유명할 만큼 마치 궁전 같았다. 1912년에 세워졌으며, 실제로 운행했던 증기기관 열차가 전시되어 있다. 1907년 헤이그 특사들이 탔던 그 열차를 탄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정복을 입은 싸늘한 표정의 여차장이 입구에서 일일이 여권과 기차표를 대조하며 몇 번씩 보고는 승차를 허락하고 있었다. 순간 긴장감이 감돌았다. 계속 이어짐

여행가·자서전쓰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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