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칼럼]울주와 학성, 그리고 울산읍성의 변천사
[이정호칼럼]울주와 학성, 그리고 울산읍성의 변천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1.03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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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지명 변천사는 매우 다양하다. ‘굴아화, 동진, 하곡, 공화, 흥려, 학성, 울주’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흥려’는 왕건에게 하곡을 귀부(918년)한 박윤웅의 공을 인정해 ‘하곡, 동진, 우풍’ 등 3현을 통합하여 ‘흥려부’로 격상시키고, 그를 흥려백으로 삼았다. 한때 ‘공화현’으로 강등되면서 991년에 ‘학성’이라는 별호를 내렸다가 1018년에 다시 ‘울주’가 되었으니 ‘학성’과 더불어 지금도 익숙한 지명이다. 그런 ‘울주’가 조선조에 들어와 1413년에 군현 규모의 작은 고을을 ‘산’이나 ‘천’으로 바꿀 때 ‘울산’이 되었다.

울산에 살면서도 다수 사람들은 울산을 잘 모른다. 딴에는 지역사에 관심이 좀 있다고 생각하는 필자도 사실은 그렇다. 그 중 한 가지가 울산읍성과 관련된 것인데, 울산문화재연구원에서 가진 두 번째 강좌인 ‘세 곳의 울산읍성’을 들으면서 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옳거니, 그게 그렇고, 이게 이렇구나’ 하는 앎에 대한 기분 좋은 표현이었다. 이런 긍정은 읍성과 관련하여 한 수를 배웠으니 그동안의 무지에서 벗어났다는 뜻도 있었고, 건축학 전공자인 한삼건 교수에게 많이 고맙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울산읍성은 조선 건국 21년만인 1413년에 시작되었다. 태종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목(도호부)군현을 두었다. 삼봉 정도전은 여기에 읍치를 통하여 군현제를 완성하겠다는 의미로 ‘읍성’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등장시켰다. 도성 안 왼쪽에는 종묘, 오른쪽에는 사직을 배치하여 역대 제왕과 토지, 곡물의 신을 모셨다. ‘인의예지신’의 의미를 담아 흥인문 등 4대문에다 가운데에 보신각을 세웠는데, 이를 축소시켜 각 군현에도 적용했다. 새로운 나라의 설계자는 삼봉이었지만 그가 이방원에게 척살당한 지 15년 후의 일이다.

조선조에는 8도에 모두 332개의 군현이 있었다. 이 중 137개의 군현에 읍성을 쌓으니 전체의 41%에 읍성이 존재했다. 변방으로 갈수록 읍성 비율이 높은데, 이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겠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현재 존재하는 읍성은 모두 35개소로,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읍성이 12개소, 시도 지정 문화재 17개소, 문화재자료 6개소 등이다. 1914년에 울산과 통합된 언양의 경우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언양읍성’ 복원을 추진 중에 있다. 하지만 ‘울산읍성’은 세 곳을 옮겨가면서 완성되었지만 420년 전에 사라지고 지금은 없다.

그 옛날 울산의 치소였던 곳을 후세 사람들은 ‘고읍성’이라고 칭했다. 고려 개국에 기여한 박윤웅을 성황신으로 모셨다는 점과 쌍학이 울었다는 반구동의 학성산이 고려 중기 이후에는 ‘울주성’이었다. 이 성은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토성이 파괴되었다가 1385년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이 고읍성이 1426년까지 35년 간 울산군의 치소였다가 그 기능을 상실했던 첫 번째 ‘울산읍성’이었다. 목책이 발굴되었던 ‘계변성’도 신라의 바닷길 역할을 수행하면서 고려 초기까지 흥려부의 치소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병영성은 두 번째의 ‘울산읍성’이었다. 1415년에 병마도절제사 겸 울산지군사가 부임하여 ‘구 울산군성’을 대신할 새로운 울산읍성 축성을 시작하여 1417년에 완성되었다. 이때부터 군영과 읍치의 기능이 통합 또는 분리되다가 1436년까지 군영이 합포로 옮겨간 10년 동안은 울산읍성 역할만 수행했다. 왜구의 준동으로 군영이 혁파와 복설을 거듭하다가 1436년부터 경상좌도병마절제사 군영인 병영성을 설치하여 1894년까지 458년간 존속했다. 다행히 성곽의 북쪽 유구들이 남아 있어서 사적 320호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상당 부분이 복원되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축성된 것은 북정동의 ‘울산읍성’이다. 현재의 위치에 치소가 정해지고, 동헌과 객사가 자리 잡은 것은 1437년 이후로 추정한다. 합포로 옮겨갔던 경상좌병영이 다시 울산으로 왔기 때문에 병영성에 있던 울산군 치소는 10여년 만에 다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북정동으로 군 치소가 이전된 지 40년이 지난 1477년에 새로운 ‘울산읍성’이 축조되었다. 둘레 3천639척에, 높이 15척의 석성은 성곽시설을 다 갖추었고, 성안에는 전패(殿牌)를 모셨던 학성관과 동헌을 비롯한 지방 관아로서의 시설들을 갖추면서 읍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북정동의 ’울산읍성’은 축성 120년 만인 1597년에 허물어졌다. 정유재란 때 읍성 돌을 빼다가 ‘도산성(울산왜성, 학성공원)’을 쌓았던 것이다. 병영성도 울산읍성과 같은 운명이었다. 세월이 흘러 고읍성이 있던 학성산에는 임란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가 들어섰다. 병영성의 부분 복원과 더불어 울산읍성도 흔적 안내판을 붙여놓아서 참 반갑다. 섣달 그믐날에 동헌 정문인 가학루가 준공을 보았고, 머잖아 객사였던 학성관도 위용을 드러낼 것이다. ‘울주’ 정명 천년 째인 새해 벽두에 울주군청의 율리시대 시작도 의미가 무척 크다 할 것이다.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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