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저력 발판, 새해엔 제조업에도 도전”
“19년 저력 발판, 새해엔 제조업에도 도전”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7.12.12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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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서 (주)젬스 대표이사
 

‘울산지식산업센터’(울산시 북구 산성로 40, 효문동)라면 4년 전만 해도 ‘아파트형공장’으로 불리던 곳. 182개 업체를 포용하고 있는 이 지상 9층 건물의 7층에서 19년째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중견업체가 있다. ‘그린에너지 시스템’(Green Energy Management System)을 약자화한 (주)젬스(GEMS)로, 대표전화번호(☎052-289-3390)도 팩스번호(052-289-3391)도 19년 전 그대로다.

업종은 ‘전기용 기계장비 및 관련 기자재 도매업’. 자신감 있게 내세우는 전략상품은 ‘에너지 절감-사고 예방’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기계장비와 기자재들로, 해상·육상 플랜트에 요긴하게 소용되는 효자상품들이다.

주요고객 명단에는 한주, 효성, 현대중공업(현대일렉트릭), S-OIL, 삼성은 물론 LG전자(창원), 세아제강(포항) 등 20여 곳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연간 매출(영업)실적은, 조선경기 후퇴와 맞물려 전년도의 반타작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40억은 거뜬히 채웠다.

“정직·열심·최선!” 社訓… 19년간 한 우물

생사고락을 오직 (주)젬스와 같이해 온 이동서 대표이사(56·사진). 그의 표정은 언제나 밝고 생각은 긍정적이다. 19년간 한 우물을 지킬 수 있었던 저력도 이러한 긍정의 마음가짐에서 우러나오지 않았을까.

12일 오전, 그의 사무실을 찾은 객에게 낡은 액자 하나를 들고 나와 보여준다. “정직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하자!”란 사훈(社訓)이 적힌, 19년 묵었다는 빛바랜 종이가 새삼 눈길을 끈다. ‘정직, 열심, 최선’은 이 대표 스스로를 단련시킨 마음의 채찍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19년 전, 1998년으로 돌아갔다. 현대중공업에 근무하던 사회선배 한 분이 낚싯밥을 던졌다. “전기 전공한 사람이 왜 실력 썩히려고 그래? 도와줄 테니 울산 내려와.” 이때만 해도 서울 강남에서 국수집을 차려 한 밑천 잡겠노라 단단히 벼르던 참이었다. (이 대표는 서울 중구 필동이 고향이다.) 하지만 뜻을 접고 사회선배의 말을 따랐고, 이것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날짜도 안 잊는다. 1998년 4월 18일 북구 효문동 아파트공장에 둥지를 텄고, 5월 13일 사업자등록을 마쳤다.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세신전기’란 이름으로….

“3개월 내 사생결단”… 부식 석 달분 장만

1998년이라면 악명 높은 ‘IMF’가 터지던 해였다. 그 해 2월, 한동안 몸담았던 ‘가이오산업’(일본 후지전기 한국대리점)을 나왔다. 그 해 4월엔 기아차 부도가 났고, 11월엔 한보철강 부도로 IMF에 모든 것을 내주는 국가부도 사태를 만났다.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빚 떨이 하고 나니 손에 남는 건 달랑 6천만 원이었어요.” 그 이후의 재산 풀이가 흥미 만점. “5천500만원으로 가족들 의지할 월세 집 한 채 얻어주고, 나머지 500만 원 들고 사회선배 코치대로 무작정 울산으로 달려 왔죠. 이 가운데 150만 원으로 대우차 ‘다마스’ 1대 사고, 150만 원으로 3개월분 부식도 장만하고….”

사생결단을 ‘3개월 안에’ 내겠다는 각오였다. 탈탈 털고 남은 돈은 200만 원. 그 중 130만 원으로 아파트형공장 7층에 ‘52평짜리’ 사무실을 하나 얻었고, 나머지 70만원은 운송비로 감당할 참이었다. 다행히도 부도 난 업체의 사무실엔 책상, 집기 등 필요한 건 대부분 다 있었다. “미안하지만 좀 쓰겠다. 단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니까.”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처음엔 현대중공업을 겨냥했다. 선박·육상 플랜트, 전기·전자 자재에 승부수를 걸었고, 배선기구 같은 전기재료를 설치·시운전하는 일에도 손을 댔다. 거래처 공략에 동원한 무기는 독일 ‘지멘스(SIEMENS)’와 일본 ‘후지’, 미국 ‘매트릭스’ 제품. 하지만 효자노릇 브랜드는 뭐니 해도 ‘지멘스’였다.

‘고난의 행군’ 극복의 힘은 現代重직원들

첫 달 수입은 고작 50만 원. 그러나 3개월 뒤엔 그 10배, 500만 원으로 불어났다. 열심히 땀 흘린 대가였고, 재미가 쏠쏠했다. 어느 정도 숨을 돌린 것은 3년이 지난 시점. 중고매장을 처음 찾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3만원 주고 침대 사고, 합판으로 방 딸린 사무실 하나 새로 꾸몄죠. 2개월 후엔 5만원 주고 TV도 한 대 사고…. 울산의 중고매장 잘 돼 있는 것, 처음 알았지 뭡니까.”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3년은 ‘고난의 행군’ 그 자체였다. “혼자 3년을 버텼죠. 3년간 사무실서 먹고 자고, 책상에 엎드려 자기도 했고요. 층마다 샤워장이 있긴 해도 물 사정이 참 안 좋았죠. 페트병에 물을 받아서 샤워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극복할 수 있는 고난이었다. 그리고 그 힘의 원천은 영업활동을 하며 친해진 현대중공업 현장 직원들이었다. “현장 직원들이 소주를 차례로 사 갖고 왔었죠. 공장건물 옥상에서 ‘부루스타 가스’로 라면 끓이고 꽁치통조림 안주삼아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나누고….” 그때 그 친구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정을 나누는 인적 자산들이다.

주변의 도움은 그밖에도 참 많았다. 그러나 텃세와 함께 시샘도 감수해야 했다. 다마스가 단지 대우차란 하나의 이유로 차유리가 박살난 적이 있었고, “저 친구는 부르는 게 값”이란 비아냥거림을 들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러나 모두 희미해진 기억의 파편들일 뿐이다.

조선업 변화 3년전부터… ‘노란봉투’ 얘기도

자립 기반을 마련한 것은 약 8년 전부터. 혹자는 이를 두고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 했던가. 하루하루를 낙천적으로 낙관하면서 살아온 덕분이라 생각했다. 옳다고 판단되면 남의 눈치 안 보고 실천에 옮기는 자신의 결단력도 한 몫 했다며 자만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8년 전 현대중공업에서 최고 금액의 발주를 받아서 돈 좀 벌었죠.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나태해지면 안 된다, 안주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한 거죠. ‘거짓 없이 올바르게 살자’는 제 인생좌우명도 곱씹었고요.”

그렇게 착실히 매달리던 차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심상찮은 예감은 3년 전부터였다. 조선업이 기운다는 사실을 간접적이지만 피부로 느끼는 횟수가 부쩍 잦아진 것. 거래처에서 싼 상품을 찾고, 브랜드 바꾸는 일이 급증하고, 현장 직원들의 하소연과 함께 ‘노란봉투’(=퇴직금 봉투) 얘기가 자주 들리고. 연말이면 인원정리 흔적이 눈에 띌 정도로 뚜렷해지고….

“잘 알고 지내던 현장 직원들이 나가기(=퇴직하기) 전에 ‘소주 한 잔 하자’는 분들이 갑자기 많아지던데요.” 그때부터 목표를 다시 세우기로 했다. ‘세신전기’ 외에 ‘(주)젬스’ 설립을 구상한 것도 바로 이 무렵 일이었다. ‘맞춤형 제품 개발’의 밑그림을 다시 그렸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지난 5월 백진호 상무(50)를 파격대우로 영입해 ‘젬스연구소’ 일을 맡기기로 한 것도, ‘엔텍시스템’(경기도 성남시 상대원동)의 싱크탱크였던 그의 재능을 빌려 내년부터 신제품 제작에 나서기로 한 것도, 모두 국제 조선업 경기와 무관치 않은 변화들이었다.

 

▲ 3년 전 늦가을 미국 댈러스 홍성남 여사의 자택에서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아들 이경민 씨, 이동서 대표, 딸 이지현 씨, 부인 홍성남 여사, 자부 김은영 씨.

부인 洪여사, 美한인교회서 성가대 지휘

이동서 대표가 결혼에 골인한 시기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의 일. 큰누님 소개로 만난 부인 홍성남 여사(50, 성악 전공)와의 백년가약을 속성사진 찍듯 속도전으로 밀어붙였다. “6월 19일 소개받고 9월에 약혼하고 11월 3일에 결혼식 올렸으니 넉 달 보름만인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교회 교인이더군요.”

부인 홍 여사는 이 대표가 ‘울총(=울산총각)’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두 자녀(1남 1녀)를 도맡아 키웠고, 미국 시민권이 있어 요즘은 미국에 거주할 때가 더 많은 편. 올 연말이면 2년 남짓한 울산생활을 접고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텍사스 댈러스의 ‘베다니 한인교회’ 초청으로 성가대 지휘봉을 다시 한 번 잡게 된 것.

부부는 울산에 머무는 동안에도 주일을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잠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신앙심의 끈은 그들을 언제나 하나로 묶는다. 안수집사(남구 강남교회)인 이 대표도 만감이 교차하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 “제가 울산에 처음 내려올 때 이런 생각을 했었죠. ‘2년 이상 떨어져 지낸다는 건 끔찍하다. 그러니 2년만 있다가….’ 그랬는데 어느새 20년 가까운 세월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네요.”

미국 DFW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댈러스에서 고교 교사로 일하는 장남(27)은 약 3년 전, 울산 북구의 한 교회에서 우연히 지금의 아내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부전자전이랄까, 신앙으로 맺어진 것은 부모와 닮은꼴. 임상병리학을 전공한 딸(23)은 텍사스 TWU대학 졸업반이다.

부인과의 이별이 못내 아쉬운 이동서 대표는 마음의 무장을 새로 한 듯 구약성경의 욥기 구절 암송으로 스스로를 달랜다. “네 처음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글=김정주 논설실장·사진=장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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