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사랑한 시인 기형도
‘고통’을 사랑한 시인 기형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12.1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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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오리로. 지난달 10일 문을 연 ‘기형도 문학관’을 찾았다. 기형도 시인은 1964년에 이 지역으로 이사를 와 유년과 학창시절을 보냈다. 문학관은 시인의 생애를 모은 기억의 집인 셈이다. 외벽에는 ‘정거장에서의 충고’ 첫 문장인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가 새겨진 흰 천이 걸려 있었다. 문학관을 지키고 있던 시인의 누이 기향도(명예관장)는 여기가 기형도의 ‘빈집’이라고 했다.

이보다 앞서, 소하동 산144 야산에 ‘기형도 문화공원’이 들어선 것은 재작년 7월이다. 공원에는 ‘백야’ ‘입 속의 검은 잎’ ‘식목제’ ‘흔해빠진 독서’ 등 4개의 시비(詩碑)가 묘비처럼 서 있다. 여러 작품 속에는 그가 살았던 70~80년대 광명시의 풍경과 정서가 짙게 묻어 있다.

1960년생인 기형도는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 파고다 극장의 한 좌석에서 뇌중풍으로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시퍼런 스물아홉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죽음과 상실의 이미지를 탐닉하고, 환멸의 시대를 검은 허무주의로 써내려간 유작 시집 ‘잎 속의 검은 잎’이 ‘기형도 신드롬’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1969년 정초, 기형도의 아버지는 뇌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기울어진 가계를 어머니가 꾸리는 가운데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신림중학교 3학년 때 바로 위의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큰 아픔이 닥쳤다. 그는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뒤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로 등단한다.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고통 속에서 시를 쓰며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덧붙여 이렇게 기록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손에는 출판사에 보내야 할 시 한 편이 들려 있었다. 그가 보고자 했던 첫 시집은 유고 시집이 돼버렸다. 그는 1980년대 이후 시를 꿈꾸는 모든 문학청년의 질투와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청춘의 불안을 우울하게 노래하되 현실을 뛰어넘는 환상의 미학까지도 펼쳐 보인 덕에 시인 지망생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시인이 남긴 단 한 권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아직도 해마다 6천 부 이상이 팔린다. 누적 판매 30만 부를 넘겼다. 영원한 청년 시인 기형도. ‘거리의 상상력’, 그 ‘고통’을 사랑하다 떠난 그의 시 ‘빈집’을 낮게 읊조려 본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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