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하면 더 엄하게 해야지”
“술 취하면 더 엄하게 해야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12.1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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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취감경’이라?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다. 하도 자주 들리기에 사전을 찾아보았다. 국어사전엔 ‘주취-’란 표현조차 없고, 겨우 찾아낸 건 인터넷 사전에서다. 괄호 안의 한자를 보니 대충 짐작이 간다. ‘주취감경(酒醉減輕)’이라! 참, 경찰용어에 ‘주취폭력(酒醉暴力)’이란 게 있었지. ‘주취감경’도 경찰용어 아니겠나. 알고 보니 형법에도 안 나오지만 법조계에선 두루 쓰이는 모양이다. ‘주취감형(酒醉減刑)’과 같은 뜻으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주취감경 폐지’ 청원이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한 달 만에 21만 건이 넘는 찬성의견이 올라와 청와대를 긴장시킨 것. 9년 전, 잔혹한 수법으로 8살 어린이를 성폭행했다가 복역 중인 조두순이 만기출소를 3년 앞둔 사실이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흉악범은 “술 때문에 기억이 없다”고 둘러댔지만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형법 제10조 제2항’(=심신장애로 인하여 전항의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한다.)을 적용, 12년형을 선고했다. 많이 봐 준 것이다.

이 조항은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며 처벌 수위를 낮출 때 적용된다. 여기서 ‘전항’이란 ‘형법 제10조 제1항’(=심신장애로 인하여 사물을 분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을 말한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가 잡지 <개벽>에 실린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 11월의 일이었다. 하지만 96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는 ‘음주(飮酒)’라면 ‘허리띠 아래 사건’ 못지않게 비교적 너그러운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그 흥미로운(?) 전통이 법조계의 뿌리 깊은 ‘폭탄주 문화’와 무관치 않다고 주장하는 호사가가 있다.

호사가 K씨는, “정통한 소식통 얘기”라며, 20년 전의 어린이날 사건(?)을 곧잘 떠올린다. 얘기인즉 이랬다. “퇴임 시기가 얼마 안 남은 울산 출신 법무부 고위인사 A씨가 울산지역 법무부 산하 기관장들을 북구 정자의 어느 고급 횟집으로 집합시켰다. 미리 준비해온 양주는 이내 폭탄주로 둔갑했고, 이 화학주는 대낮인데도 회식자리를 점령해 갔다. 주량이 약한 기관장 몇 분은 폭탄주 겨우 서너 잔에 백기(白旗)를 들고 옆방 ‘열외(列外) 신세’를 자원(?)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뚝심 좋게 ‘내기 주량’을 과시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사고가 터졌다. 수사 베테랑 J씨가 본의 아니게 실수를 저지른 것. 횟집 노래방기기에 한쪽 손을 다쳐 선혈이 선명했고, 취기 탓에 그 붉은 자국은 최고위인사 A씨의 하얀 와이셔츠를 적시기도 했다.”

‘심신미약(心神微弱)’ 주장은 조두순의 입에서만 나온 게 아니다. ‘이른바 ’어금니 아빠’ 이영학은 살인을 환각제에 취해 저질렀다며 선처를 기대한다. 파렴치범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 처지가 돼 본다면 ‘형법 제10조 제2항’을 적용할 엄두를 낼 수 있을까?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주취감경’이 이미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만큼 조항 자체를 폐지할 필요까진 없다는 의견을 내세운다. 청와대도 그 때문인지 접근 태도가 아주 조심스럽다. 국민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청와대는 “성범죄에선 이미 술로 인한 심신미약이 인정되지 않고 있고, 다른 범죄에도 같이 적용할지 여부는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며 공을 국회로 넘겼다.

그러나 강경론자들은 다르다. “술에 취했으니 봐 준다”가 아니라 “술에 취했으니 더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경찰청 통계를 예시하기도 한다. 지난해에 검거된 살인 및 살인미수범의 약 40%, 성폭행범의 약 30%가 음주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 지금은 검찰 고위직에 있는 J씨라면 이 난감한 사안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것이 궁금해진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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