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끝·낙안소 그리고 ‘나가소’
배리끝·낙안소 그리고 ‘나가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11.2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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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창남창 배리 끝에 무정하다 울 오라비야/ 나도 죽어 후생 가면 낭군부터 정할래라…’(모심기 노래)

모심기 노래 속에는 여동생의 오빠를 향한 원망의 이야기가 전한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아내와 여동생을 함께 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직 한쪽만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선 오빠는 결국 아내를 먼저 건졌다. 여동생은 떠내려가면서 오빠를 향해 가슴 아픈 한마디 말을 내뱉는다. “나도 죽어 후생 가면 낭군부터 정할래라…” 여동생의 섭섭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민요이다. 애절한 전설은 ‘배리 끝’에 남아 지금도 지나는 길손의 입을 통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배리 끝’ 전설은 지형과 무관하지 않다. 배리 끝은 경사가 가파르고 폭이 좁은 강가의 위험한 길이다. 때문에 아차 한번 실수라도 하면 미끄러져 곧바로 벼랑아래 물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배리 끝은 백척간두(百尺竿頭) 같은 위험한 지형이다. 다른 말로 ‘벼랑 끝’이라 부른다.

‘낙안소(落雁沼)’는 기러기가 내려앉는 깊은 물웅덩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낙안(落雁)은 기러기가 물에 떨어지듯 내려앉는 모양을 표현한 말이다. 실제로 기러기는 떨어지듯이 수면에 내린다. 갈대숲이 배경이 된 물가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그림을 노안도(蘆雁圖)라 부른다. 노안은 노안(老安)과 발음이 같다. 늙어서도 안락하게 살아갈 것을 바라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안수해(雁隨海) 접수화(蝶隨花) 해수혈(蟹隨穴)’. 이 말은 춘향전에 나오는 말이다. 이 도령이 방자더러 그네 뛰는 춘향이를 데려오라고 하자 도리어 춘향이가 방자에게 한 말이다. 내용인즉 ‘기러기는 바다를 찾고, 나비는 꽃을 찾으며, 게는 구멍을 찾는다.’이다. 이러한 진리도 모르는 이 도령에게 일침을 가하며 던진 춘향의 메가톤급 메시지인 셈이다.

기러기는 월동지와 서식지로 이동할 때 함(緘)자가 새겨진 갈댓잎을 하나씩 물고 간다는 말이 있다. 입을 열고 ‘떼떼떼’ 소리를 내면 포식자가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철부지 새끼기러기가 어른 말을 듣지 않고 입을 열어 갈댓잎을 떨어뜨려 희생됐다는 전설도 있다. 물론 인문학적 이야기지만 기러기의 생태를 관찰한 이후 생성된 것으로 한번쯤 귀담아들을만한 교훈이다.

기러기와 오리의 차이를 보자. 몸집에서는 기러기가 크다. 기러기는 곡식을, 오리는 수초를 먹는 차이도 있다. 주로 뭍에서 서식하면 기러기, 물에서 살면 오리로 구분된다.

소(沼)는 깊은 강물을 말한다. 비슷한 용어로 연(淵), 담(潭), 수(藪) 등으로 표기한다. 용이 산다는 용검소(龍黔沼), 황용이 산다는 황용연(黃龍淵), 백용이 산다는 백용담(白龍潭), 이무기가 산다는 구수(九藪) 등이 그것이다. 제시한 4가지는 모두 태화강에서 찾을 수 있다.

‘나가소(羅哥沼)’라 부르는 연유는 이러하다. 부자인 ‘나가(羅哥)’가 하룻밤 묵어가길 원하는 나그네 ‘목가(睦哥)’를 푸대접하여 그 응보로 벼락을 맞아 나가의 집이 소(沼)로 변했다는 전설이다. 나가소는 다른 말로 ‘낭관소(郎官沼)’라고도 부른다.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결국 낙안소가 ‘나가’, ‘못가’와 발음이 비슷한 ‘나가’와 ‘목가’를 끌어들여 나가소를 만들더니, 다시 낭관소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나가소와 낭관소의 꼬리에 ‘-소’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두 명칭 모두 낙안소의 발음에서 변용된 이름이 아닌가 한다. 꼬리의 흔적을 쉽사리 잘라버리지 못해 단서가 잡힌 것이다.

이런 관점은 ‘낙안소(落雁沼)’라는 본래의 한자를 확인하지 못한 채 전달하는 과정에서 나씨(羅氏)와 목씨(睦氏)를 끌어들여 그럴듯한 이야기로 꾸며 나가소가 되었다고 짐작된다. 또한 와전된 발음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의미가 사실과 다르게 ‘낭관소’가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에도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 (서부경남) 사람의 발음인 ‘핵교(→학교)’, ‘갱재(→경제)’ 등에서도 그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울산의 사례는 원어인 ‘계변(戒邊)고개’가 ‘개배이고개’, ‘개비고개’, ‘개미고개’ 등으로 변형된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가소’와 ‘낭관소’의 전설은 민속학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자 못 설화’ 혹은 ‘장자 방죽 설화’의 유형과 유사한 맥락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타나는 못 혹은 깊은 물의 전설에는 거의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취지에서 생긴 소(沼)의 내용을 담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주로 생성된 설화이다.

배리 끝에는 초여름이면 여동생의 애절한 전설을 말해주듯 노란 어리연이 지천으로 핀다. 그러나 낙안소에서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습을 십 수 년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쉽다. 요즘은 물고기가 주된 먹이인 잠수성 비오리만 기러기를 대신해 삼삼오오 한가롭게 깃을 고르고 있다.

울산시가 ‘태화강 국가정원’ 지정을 실현하기 위해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고 전한다. 태화강이 품은 전설도 인문학의 꽃으로서 태화강 국가정원 지정에 한 몫 하길 바란다.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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