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무불성(狗者無佛性)이니이까?”
“구자무불성(狗者無佛性)이니이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11.19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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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개에 대한 이야기에 미담(美談)보다 혀를 차는 사건이 자주 거론되어 안타깝다. 이 기회에 개와 관련된 이런 저런 쇄담(?談)을 늘어놓는다.

<개의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The tail wags the dog).>는 속담이 있다. 의미는 ‘개의 몸통이 꼬리를 흔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것으로 주인과 손[客]의 역할이 뒤바뀌어 거꾸로 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애완견(愛玩犬)에서 ‘애완(愛玩)’의 사전적 의미는 ‘좋아하는 것을 곁에 두고 보거나 만지는 것’이다. 애완견은 개를 대상으로 견주가 일방적으로 애완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혹은 가지고 노는 대상인 완호지물(玩好之物)이 견(犬)인 셈이다.

반려견(伴侶犬)에서 ‘반려(伴侶)’란 ‘짝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부부관계를 일컫는 표현으로 반려자(伴侶者) 혹은 동반자(同伴者)로 쓴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사회에서 쉽게 표현되는 반려견은 개념이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사람과 개의 이종(異種)이 반려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의무와 책임이 반드시 따라야 지속될 수 있다.

유기견(遺棄犬)에서 ‘유기(遺棄’)는 ‘내다버린 것’을 의미한다. 유기견이란 ‘키우다 버린 개’로 해석된다. 귀밑머리 쓰다듬고 황촛대 불빛아래 합환주를 마시며 백년해로를 약속한 반려자인 부부도 사정에 따라 갈라서서 남이 되는 세상이다. 유기견은 또 경기 악화 때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가난이 창문 열고 들어오면 사랑은 대문 박차고 나간다.>는 속담이 연상된다. 뱐려견이라 하지만 ‘개 주인’이라는 의미의 ‘견주(犬主)’라는 말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버림당함이 없고 동등하며 함께할 때라야 ‘반려’라 할 수 있다. 간혹 유기견의 애처로운 눈빛을 볼 때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맹견(猛犬)은 사나운 개를 말한다. <사나운 개 콧등 아물 날 없다.>는 속담은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조신(調信)의 열 살짜리 딸아이가 맹견에 물린 내용이 전한다. “부부는 늙고 병들고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열 살짜리 딸아이가 밥을 빌러 돌아다녔는데, 마을 개에게 물려 앞에 누워 호소하니, 부부는 목이 메어 흐느끼며 눈물을 줄줄이 흘렸다.” 이 내용에서 ‘마을 개’로 기록된 리오(里獒)는 ‘몸집이 크고 사나운 맹견’을 의미한다.

맹견의 사례는 또 있다. ‘주미구맹(酒美狗猛)’이라는 말은 ‘술맛은 좋으나 사나운 개가 있어 술손님이 없다.’는 말이다.

신흠(申欽·1566~1628)의 ‘거폐편(去蔽篇)’에 나오는 일부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일찍이 송나라 양휘지(楊徽之·921~1000)의 시에 나오는 표현과 일맥상통한다. “개는 대나무 울타리에서 술 사는 손을 보고 짖고…(犬吠竹籬沽酒客…)” 술집에는 으레 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맹견인 경우 장사는 결국 접어야 한다.

‘개를 놓으면 청삽사리 네눈박이 안마당에 곤드라졌다. 낯선 사람 오게 되면 커겅겅 짓는 소리 지전 깔죽이 물밀듯하누나. 에…’(민요 장끼타령)

개는 짖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기도 한다. 근래에 반려견이 사람의 다리, 코 등을 물어서 그 결과 죽거나 봉합수술을 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이러한 사건은 반려자인 사람에게 심적으로 당황하게 할 뿐 아니라 물적으로 상당한 부담까지 준다. 또한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언어가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오해와 착오가 분분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사람과 개의 반려관계는 통하는 언어가 서로 다르기에 각각의 행동이 돌발적이며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견(犬)과 인(人)의 반려관계가 지속되려면 견주가 챙겨야할 여러 가지가 많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반려견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긍정적 시각과 부정적 관점이 병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반려견과 외출할 때, 흔히 생기는 일이지만, 목줄을 하지 않고 배설물 처리가 미흡할 경우 반려인은 대중의 질타를 당연히 감수해야할 것이다.

수년전부터 각 지자체는 증가하는 반려견을 위해 애견운동공원을 마련해주고 있다. 앞으로 반려견은 반드시 반려견운동공원을 이용하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반려견을 배려하는 것이다.

한 납자(衲子=납의를 입은 숭려)가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구자무불성(狗者無佛性)이니이까?(=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은 한마디로 “무(無)”라 했다. 물론 선승의 화두적 접근이다.

현실에서 반려견을 바라보는 대중이 나서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조주는 힘주어 “유(有)”라 했다. 제발 그러길 바라는 심정이다.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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