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통신사는 일본인 관점, 對日통신사로 불러야”
“朝鮮통신사는 일본인 관점, 對日통신사로 불러야”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7.11.1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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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 지난해 5월, 외교부 국립외교원 구내의 ‘통신사 이예 동상’을 참배하는 (사)충숙공이예선생 기념사업회 회원들.

-일본대사 울산 초대의 숨은 주역

창작뮤지컬 ‘이예(李藝) 그 불멸의 길’ 2일차 공연의 막이 오른 지난달 28일 저녁나절. 울산문예회관 대공연장 내빈석에 울산이 초행(初行)인 초대손님 셋이 조심스레 앉음새를 고쳐 잡았다. 이날 최고의 빈객은 김기현 울산시장 오른쪽 옆에 앉은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일본대사. 그를 수행한 ‘후지사와 키이치(藤澤きいち)’ 3등서기관과 ‘고무라 데츠오(古村哲夫)’ 재(在)부산일본총영사도 나란히 자리를 같이했다.

대사를 울산으로 초대한 이가 누구일까? 궁금증은 며칠이 지나 풀렸다. 주인공은 외교관 이미지가 더 어울려 보이는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66, 경제학박사·사진). 나가미네 대사의 울산 초대 뒷얘기가 궁금했다.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좋다’고 승낙합디다. ‘한일 친선’이란 말에 힘을 주더군요.” 뮤지컬 주인공이 ‘조선의 외교관’이란 설명이 대사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고도 했다.

대사관저 예방과 대사 면담에는 ‘고향후배’ 이채익 국회의원의 도움이 컸다. 이 의원은 한일의원연맹의 ‘통신사포럼’에도 관여해 교량역으론 적격이었던 저명인사. (이명훈 교수와 이채익 의원은 같은 ‘학성이씨’ 집안이자 안태고향도 양산시 웅산면 명곡리(명동)의 ‘홈실마을’로 똑같다.)

-충숙공 존경… 기념사업 ‘내 일처럼’

이명훈 교수는 화려한 경력에 비해 직함은 소박한 느낌이다. 몇몇 직함 가운데 ‘사회봉사’ 분야의 직함 하나가 특히 시선을 끈다. ‘(사)충숙공이예선생기념사업회(이하 ‘이예기념사업회) 이사’가 그것. 경제학박사가 한일관계사 특히 ‘통신사(通信使) 역사’에 깊이 파고드는 모습이 경이로 다가왔다. 그의 논문 중에 단연 압권인 것은 <최초의 대일통신사, 이예(最初の對日通信使, 李藝:이명훈·유종현·이동광 공저, 조선통신사학회, 2013)>다.

한마디로 그는 ‘충숙공 이예 마니아’다. 옥동∼농소간 도로 명칭을 ‘이예로(李藝路)’로 정해야겠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뮤지컬 이예’를 널리 알리려고 내 일처럼 뛰어든 것도 충숙공에 대한 존경심과 그 때문에 얻은 ‘직함’(이예기념사업회 이사)의 무게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사직 수락 이유가 이를 말해준다. “충숙공에 대한 개인적 존경심이 저를 움직였습니다.”

이 교수는 충숙공을 존경하는 이유로 남다른 충성심과 효심(孝心), 그리고 뛰어난 외교력 등 3가지를 주저 없이 손꼽는다. 하긴 그의 지론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춘포문화장학재단(이사장 이덕우)이 주는 제16회 춘포문화상의 ‘충효(忠孝)’ 부문 수상자에 ‘이예기념사업회’가 선정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 교수는 그 나름의 ‘위인 대망론(偉人待望論)’도 펼쳐 보인다. “우리 사회가 위인을 발굴하고 선양하는 데 너무 인색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한테 존경하는 사람 말해 보라 하면 대부분 ‘링컨’ 같은 외국인 이름을 대지 우리나라 위인에 어떤 분이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우리의 위인을 통해 긍지를 가질 통로가 아직은 잘 안 보이는 겁니다.”

그는 또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선(線)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점(點)의 개념으로만 보는 것 같다며 아쉬워한다. 콘텐츠를 중요시하지 않는 것도 서운한 일이라고 덧붙인다.

-이예, 태화동서 태어나 71세에 타계

이명훈 교수가 ‘위인’으로 받드는 충숙공 이예(1373~1445)의 생애는 조선왕조실록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서술들이 이예 선생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있다. 과연 어떤 분이었을까?

‘이예, 그 불멸의 길’ 팸플릿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이예의 가장 두드러진 공적 중의 하나는 조선 건국 초기, 왜구의 침입으로 불안정했던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일이다. 근대 이전 우리 외교사에 있어서 대일(對日)외교를 주도한 전문외교관이었다.”

또 울산박물관이 2013년 10월1일∼2014년 2월2일, 4개월에 걸쳐 마련한 특별전(‘조선의 외교관 이 예, 바다를 건너다’)의 홍보 블로그 ‘울산누리’에는 이런 서술이 있었다. “이예는 조선 전기의 외교관으로 40여 회에 걸쳐 일본통신사로 파견되어 667명의 조선포로 송환과 일본에 삼포개항(三浦開港)을 허락한 ‘계해조약’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예의 본관은 학성(鶴城), 아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1373년 울산에서 태어나 1445년(세종 27) 2월에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이예 선생이 별세했을 때 그의 벼슬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종2품)였다. 또 그는 고려 공민왕 22년(1373년) 울주군 말응정(현재 중구 태화동)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8세) 어머니가 왜구에게 납치됐으며, 25세 때는 세종대왕의 명으로 대마도에 사신의 일행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충숙공 이예 기념사업’은 정부 차원의 사업만 해도 수두룩하다. 어찌 보면 그의 고향 울산보다 타지에서 더 알아주는 위인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2005년 2월에는 문화괸광부가 ‘이 달의 문화인물’로, 2010년엔 외교부가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각각 선정했다. 그러다가 2015년 3월 25일엔 외교관 양성의 요람인 국립외교원(서울 서초동) 외교사료관 앞뜰에서 동상 제막식을 거행하기에 이른다.

동상 건립에는 정갑윤 국회의원(당시 국회부의장)의 공이 컸다. 또 제막식에는 기념사업회 회원, 김기현 시장, 박영철 시의장, 신장열 울주군수, 벳쇼 고로(別所浩郞) 주한일본대사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당시 지역 언론 기사에는 이런 대목도 있었다. “여러 차례 교토의 ‘일본국왕’(쇼군=將軍)을 만났고, 한·일 최초의 외교협약 ‘계해약조’의 체결을 주도했으며 71세까지 외교현장을 지켰다.”

-“유네스코 등재 기록물, 조선후기 한정”

이명훈 교수는 한일 합작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소위 ‘조선통신사 기록물’에 대해 유감이 많다. ‘부산문화재단’을 비롯한 한국 쪽 추진그룹이 일본 쪽 계략에 놀아나다 보니 1428년부터 시작된 조선전기(朝鮮前期) 통신사 기록이 깡그리 외면당했다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것.

그는 손승철 교수(국사편찬위원, 전 한일관계사학회 회장, 전 강원대 교수)가 그의 논문(2003)에서 “‘조선통신사’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며 우리나라 사료에는 ‘일본통신사’ 또는 ‘통신사’로 기록돼 있음을 밝혔다”고 말한다. ‘조선통신사’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의 관점에서 붙인 명칭일 뿐이라는 것. 그는 이미 11년 전(2006), ‘조선통신사’가 아니라 ‘대일통신사(對日通信使)’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구체적으로 제안한 바 있다.

최근 그는 이런 글도 남겼다. “이번에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이 일본의 조직적 방해로 등재되지 못한 점은 우리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통신사 기록물’이 조선 후기의 기록물로 한정된 이면에도 이와 같은 일본의 전략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편리를 위해 ‘덕천(德川)막부 시대’로 한정하고, 일본의 명분을 위해 임란(壬亂) 이전 조선이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던 시대를 배제하려고 노력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다고 이 교수가 유네스코 등재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충숙공의 고향인 ‘울산의 관점에서는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런 의문을 던진다. “유네스코 처분대로 하자면 충숙공은 ‘통신사’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러면 우리가 그간 알고 있었던 충숙공의 역사는 거짓이었나?”라고…. 그러면서 이런 결론을 단호하게 내린다. “통신사가 조선전기에도 존재했다는 것은 연구자가 알고 있고 학자가 지켜야 할 학문적 진실입니다.”

 

 

-옥동∼농소 ‘이예로’ 작명에도 한 몫

이명훈 교수가 집념으로 성사시킨 일 가운데 빠뜨리면 섭섭해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남구 옥동∼북구 농소간 도로(16.9km) 이름을 ‘이예로’로 명명하도록 치열하게 매달린 일이다. “작년 12월인가, 시에서 이 구간의 도로명을 시민공모로 정한다고 공고를 내리라곤 예상도 못했지요. 지난 9월 농소∼성안 구간만 열려 아직 ‘반쪽 개통’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지요.”

사실 도로명으로 역사적, 국가적 인물의 이름을 채택한다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이 교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울산만 해도 그런 전례가 있지 않습니까? 최현배 선생을 떠올리는 ‘외솔큰길’, 박상진 의사를 생각나게 하는 ‘고헌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를 기리는 ‘아산로’가 대표적인 본보기지요.”

이 교수는 충숙공 이예 선생의 18대손이다. 그래선지 이예 선생의 업적이 인위적으로 가려지는 것은 참기가 힘들다. 조선전기에 왜구의 노략질을 능히 제압할 수 있었던 것도, 계해조약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 왜구의 만행이 한 건도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충숙공 덕분이었다고 굳게 믿는다. ”

-경력 화려… 큰아들은 UNIST 교수

이 교수는 경남 양산서 태어났지만 학령기엔 부산서 학교를 다녔다. 중앙중학교 후배동문으로 김기현 울산시장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있다. 고등학교는 교류의 폭이 좀 더 넓다. 경남고등학교 23회 출신으로 정갑윤, 박맹우 국회의원도 같은 배지를 달았다.

서울대 농경제학과, 미국 산타클라라大 응용경제학과, 위스콘신大 경제학과를 두루 거쳤고,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1987~2013)를 끝으로 현재까지 명예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종교는 가톨릭. 17세 때 부산 동대신성당에서 ‘세베리노’라는 영세명을 받았다. 부인 김윤경 여사(64)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채호 씨(37)는 UNIST 경영학부 교수, 둘째 아들 채인 씨(34)는 장로교신학대학 대학원생이다. 이 교수의 주량은 소주 한 병 정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지심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달고 다닌다.

글=김정주 논설실장·사진=김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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