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학칼럼]민주주의를 넘어서는 화백제도
[박정학칼럼]민주주의를 넘어서는 화백제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11.1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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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4.19로 시작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고대의 직접 민주주의의 예로 그리스 민주주의를 든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만을 민주주의로 생각하는 모습이다.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서구에서 들어왔기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는 단군왕검이나 박혁거세, 왕건 등이 추대에 의해 임금이 되었고, 신라에서는 ‘전원 찬성’을 원칙으로 하는 화백제도라는 것이 있었다고 가르친다.

서구식 민주주의(democracy)는 ‘대중(demos)의 권력(crotia)에 의한 정치형태’를 뜻하므로 다수라고 하는 양적인 것을 우선시하여 수적으로 우세를 점하려는 경쟁을 가져오는 제도지만, 우리 화백제도는 대중의 뜻을 가장 올바른 하나로 모아가는(衆議一歸爲和白) 회의제도로서 민(民)만이 아니라 민과 나라 ‘전체가 하나 됨’이라는 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제도다.

‘추대’라는 것도 당연히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보다 한 단계 앞서는 제도인데도 민주주의라고도 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문화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한심한 작태다.

특히 서로 싸우지 않고 함께 잘 살자는 ‘평화로운 공동번영’이 온 인류의 이상일진대, 사람이 이기심을 타고났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인자유주의식 경쟁논리로써는 영원히 그것을 달성할 수가 없고 오히려 갈등을 더 키우게 되어 현실적으로 1% 대 99%라는 극단적 양극화를 초래했다.

반면, 우리 조상들은 바로 너와 내가 남이 아니라 하나라는 하나 됨의 논리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에 따라 살아왔으니 민중의 뜻(衆議)을 하나로 만드는(一歸) 화백제도나 추대를 통해 하나 됨을 실천해왔다. 이홍범 박사는 『홍익민주주의』에서 홍익인간이 ‘우주의 본성이 너와 나를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는 ‘하나 됨’의 논리라고 주장했다. 근본적으로 너와 나를 둘로 나누어 보느냐, ‘우리’라는 하나로 보느냐 하는 인식의 차이에서 나온 문화다. 최근 과학에서도 우주가 초끈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과학이론이 나오고 있으니 우리 조상들의 앞선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평화교육의 일환인 갈등해결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 할 면이 있다.

세계 역사 속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갈등이 발생하면 전쟁, 테러, 범죄 등의 폭력적 방법이나 소송 등을 통한 명령, 집단행동을 통한 압력이나 억압 등 강제적인 방법, 또는 당사자 간 협상, 합의 만들기, 전문중재인의 중재, 시민참여 정책결정 등의 자발적인 방법 등을 통해 해결해왔으나 최근 세계적으로 평화교육을 통해 서로 협력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발적인 방법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가 숨겨진 갈등의 원인을 끄집어내 드러내놓고 이해 당사자 간에 자율적인 합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인데, ‘타인의 주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등을 기본원리로 한다. 이런 점은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속을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상대의 솔직한 마음을 듣고 인정을 하면서 자기중심의 입장을 수정해 가도록 함으로써,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사람도 섭섭하거나 답답하게 하지 않게 했던 화백제도와 매우 많이 닮아 있다.

그렇다면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적 갈등해결 프로그램을 수입하여 가르치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적 화백제도를 철저히 연구하여 화백형 갈등해결 프로그램으로 재창조하여, 외국으로 수출한다면 세계의 평화적인 공동번영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간의 자율적인 협상과 조정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강화되어야 한다. 우리 것에 대한 정부의 인식 변화를 기대한다.

<박정학 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예비역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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