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길 걷고 싶어도 바른길 꼭 지킬 것”
“지도자 길 걷고 싶어도 바른길 꼭 지킬 것”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7.10.31 2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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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극복하고 옥동서 횟집 차린 천하장사 신봉민
▲ 신봉민 장사.

-“씨름판 장사들 요즘 뭘 하나?”

“한때 국민적 사랑을 받던 민속씨름이 부침을 거듭하며 인기가 예전 같지 않지만 과거의 향수를 기억하는 올드 팬들은 모래판을 장악했던 장사들에 대한 각별한 추억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일까? 설날 등 명절에 씨름을 접하면 과거 장사에 대한 궁금증이 동한다.” ‘스포츠Q’의 안호근 기자가 설날 다음날인 지난 1월 29일 작성해 올린 “과거 씨름판 장사들은 요즘 뭘 하고 지낼까?”란 제목의 기사다.

안 기자의 말처럼 요즘 민속씨름의 인기는 예전 같지가 않다. 프로팀의 퇴장이 웅변으로 말해준다. 그런 와중에도 민속씨름의 명맥을 끈질기게 잇고자 하는 씨름단이 울산에도 하나 있다. 실업팀인 ‘울산 동구청 돌고래씨름단’이다. 지난 9월 30일~10월 5일 경북 구미시 박정희체육관에서 열린 ‘2017 추석장사씨름대회’에선 네 체급 중 태백·백두 두 체급을 석권하며 울산의 체면을 살려주기도 했다.

한때 ‘실업팀’이 아닌 ‘프로팀’에서 전국의 모래판을 호령하던 천하장사가 지금 울산에도 있다. ‘스포츠Q’ 기자는 간단하지만 이렇게 그의 근황을 소개했다. 물론 1월 29일 즈음의 근황이다. <30, 35대 장사 신봉민은 울산에서 투병생활을 한 뒤 현재 회복기를 거치고 있다.>

-‘씨름판-산업계 천하장사의 만남’

신봉민 천하장사(43, 울산씨름협회 이사·사진)의 하반기 근황을 알게 된 것은 지난 9월 26일 저녁 시간대에 스마트폰으로 날아든 한 장의 사진 덕분이었다. 울산지역 산업체 퇴직 CEO들로 구성된 NCN(New Challenge Network=울산전문경력인사지원센터) 회원들의 회식 자리 한가운데에 듬직한 모습으로 앉은 신 장사의 모습이 선명했다. ‘산업계 천하장사 NCN 위원들과 조우한 모습’이란 사진설명이 따로 달렸다.

이 흥미 만점의 사진을 전송한 분은 NCN의 산파역을 맡았던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산업고도화센터장 이동구 박사. 이 박사가 전화로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씨름판의 천하장사와 울산 산업계의 천하장사들이 만난 겁니다.” 호기심이 동했다. ‘투병생활’ 그 이후의 빈칸을 메워야겠다는 욕심도 같이 생겼다.

그로부터 딱 한 달 후(10월 26일) 점심나절, 신 장사를 직접 만나봐야지 하는 생각에 신발 끈을 고쳐 맸다. NCN 위원이자 에너지환경기술연구소 소장인 김귀열 박사의 연락을 받은 지 여드레 뒤였다. 약간씩의 시차를 두고 NCN 위원들이 꾸역꾸역 모여든 곳은 남구 대공원입구로 21번길 9(옥동)의 1층. ‘신장사(辛壯士) 회’란 간판이 달린 식당이다. 이색적인 것은 ‘신장사’란 글자와 ‘회’란 글자 사이에 ‘天下壯士’란 작은 한자 글씨가 인장 모양으로 찍혀 있다는 점.

‘농업은행 울주군청출장소’가 지척에 있는 이 건물(한때 ‘목요장’이 열리던 저자거리의 ‘대복복집’ 옆 4층 건물)은 알고 보니 신 장사가 평소 조언도 듣고 ‘어르신’이라 예우하는 김귀열 박사 소유였다.

-‘NCN 옥동파’ 7인, 아지트 삼기로

이날 정오 무렵, ‘신장사 회’ 1호실에 NCN 위원 7인과 이동구 박사, 그리고 신봉민 천하장사가 자리를 같이했다. NCN 소속은 김귀열 에너지환경기술연구소 소장(공학박사, 기술평가사·기술경영사), 김기병 기계산업 전문위원(울산대 겸임교수), 김영수 화학산업 전문위원, 박순호 기계산업 전문위원(기술평가사), 박재준 연구위원, 박창기 기술가치평가위원(기술평가사·경영사, NCN 사무국장), 신태용 연구위원 제씨였다.(가나다 순)

어떤 성격의 자리인지 궁금했다. 김영수 위원이 알아주는 재담꾼답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옥동에 사는 NCN 위원들의 모임이라 보시면 됩니다. 이 횟집서 가끔 만나다가 의기투합해서 지난 6월 하순 발기대회까지 열었지요, 하하∼. 제가 ‘두목’으로 추대됐는데 일을 ‘두 몫’(2인분)은 하라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식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는 ‘옥동회’, 또 다른 이는 ‘옥동파’라고도 했다. ‘옥동파’가 더 멋지다며 껄껄 웃는 분도 나왔다. 내친김에 이날의 주인공 신봉민 장사의 인생역정 얘기를 다 같이 듣기로 했다. ‘공개 인터뷰’가 시작된 것. 순진한 성격의 신 장사 얼굴도 발그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무렵 신 장사의 멘토이자 건물주인 김귀열 박사도 뒤늦게 합류했다. 누군가가 농담으로 좌중을 웃겼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로….

 

▲ 지난달 26일 점심나절, 남구 옥동 ‘신장사 회’ 1호실에서 자리를 같이한 ‘NCN 옥동파’ 멤버들과 신봉민 장사. 신 장사 오른쪽이 이동구 박사.

-주방장 동생 도와 ‘판촉이사’ 자임

상호(‘신장사 회’) 얘기부터 듣기로 했다. “내 이름 넣지 말라고 끝까지 버텼는데 개업 직전에 양보하고 말았지요.” 상호 씨름에서는 결국 동생 신성민(41)씨와 부인 김현정(42)씨가 신 장사를 ‘진땀승’으로 눌러 이긴 셈이 됐다.

‘친구의 친구’ 소개로 만난 현정 씨(춘해대학 사회복지 전공)와는 5년 열애 끝에 고락을 같이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씨름판은 현정 씨에게 ‘금단의 지역’이나 다름없었다. “아내가 씨름장 오는 것 억수로 안 좋아했습니다.” 신 장사 자신의 소신 탓이었다고 했다.

개업 시점은 지난 4월 초. 투자는 형제가 반반씩 했다지만 울주군 남창에 사시는 모친(67)의 도움이 컸다.

음식점 일은 셋이서 역할을 나누어 한다. 주방장 역할은 아무래도 동생 성민 씨의 몫이다. 성민 씨는 그동안 요리 잘하는 식당에서 무보수로 주방 일을 익혔다. 그 대신 주방보조 일은 봉민 씨가, 카운터 일은 현정 씨가 맡고 있다.

식당에서 신 장사가 유난히 돋보이는 날이 있다. 울산에 살고 있는 씨름가족들이 이따금 찾아와줄 때다. 판촉이사(?) 일도 톡톡히 겸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NCN 옥동파’들이 아지트로 삼아주고 있으니 두 어깨, 두 다리에 힘이 불끈 솟을 수밖에 없다. 손님 접대는 아직 서툰 편. 하지만 ‘날 때부터 장사가 없듯이 날 때부터 베테랑이 어디 있나’ 하는 심정으로 대인접촉 기술을 차근차근 익혀 나가고 있다.

-병수발 아내, 언양서 치킨집 열어

음식점을 개업하기까지 신 장사는 자신과의 모진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얘기는 7년 전 봄으로 거슬러 오른다. 몸이 너무 나른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어 찾아간 병원에서 날벼락 소리를 듣게 됐다. ‘림프암(=임파선암)’이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진단결과를 통보받은 것.

그때부터 부산대학병원에서 모래판 씨름 대신 병마와의 샅바싸움에 매달려야 했다. 암과의 투쟁은 1년 7개월이나 계속됐다. 시간과 상태는 정비례했지만 ‘추적관찰’은 4년이나 끌었다. “이젠 괜찮다”는 의사의 말이 마침내 떨어졌다.

“제 옆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봤습니다. 저는 그래도 행운이지요. 3년 내 70%, 5년 내 80%가 사망한다는 림프암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까. 체력과 근력이 강하고 열심히 챙겨 먹은 덕분이었을 겁니다.” 항암치료를 하는 사이 몸무게가 선수생활 할 때보다 45kg나 빠졌으나 잘 먹기 시작한 뒤로는 다시 15kg나 회복되는 체험도 맛보았다.

그러나 이 기간 내내 부인 현정 씨는 마음고생, 몸고생을 말없이 견뎌내야 했다. 남편 병수발 하느라 언양에서 치킨 집까지 열었다. 속속들이 말은 다 안 해도 아내의 은혜를 이승 하직할 때까지 갚아 나가겠다는 게 스스로에게 하는 신 장사의 다짐이다.

-“신생팀·빈자리 생긴다면 도전할 생각”

돌아가신 부친은 고향이 울산이다. 신 장사가 어릴 땐 주로 현대중공업에서 근무하셨고, 사우디나 이라크 공사현장에서 일하신 기억도 남아있다. 그러다가 부산에서 일자리를 구하셨고, 신 장사 가족들의 부산 생활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씨름과의 인연은 부산 감천초등 5학년 때 소년체전 부산지역 선발대회를 계기로 맺어졌다. 특기생은 아니었지만 거뜬히 입상해 주목을 받았다. 스카우트의 손길이 어린 그를 부산 금성중·고등학교 씨름부로 차례로 이끌어 주었다. 울산 ‘현대씨름단’과 계약을 맺은 시기는 고3 때였다. 1,2학년 때까지 울산대 체육학과에 적을 둔 뒤 현대씨름단에 입단한다는 조건이었다.

드디어 프로 입문의 길이 열렸다. 1994년, 한창나이 21세 때의 일이었다. 창창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30회 천하장사대회(1994)와 제35회 장사씨름대회(1997)에서 두 차례나 꽃가마를 탔다. ‘천하장사’ 타이틀을 거머쥔 것. 2002년도엔 설날장사대회 우승, 한가위장사대회 우승의 영예도 안았다. 그러나 아쉬움은 있었다. “이만기 선배 때만 해도 1년에 천하장사 기회가 4번은 있었는데 저희 땐 한 번뿐이었지요.”

그래도 후회는 없다. 백두장사, 천하장사, 지역장사, 설날장사, 한가위장사 대회를 통틀어 우승 기록이 30여 회는 족히 되기 때문이다.

‘신장사 회’는 집안의 생활밑천이지만 그래도 민속씨름에 대한 열정만큼은 숨길 수가 없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도자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하지만 경우에 어긋난 짓은 결코 안 할 겁니다. 코치나 감독 하시는 분들, 다 저하고 친한 선후배 사이 아닙니까? 신생팀이 생긴다거나 빈자리가 생긴다면 몰라도….

스포츠Q의 안호근 기자는 그의 기사를 이런 글로 맺었다. “한때 씨름판을 호령했던 장사들은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씨름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추억의 씨름스타들이 힘을 모아 예전의 영광을 되찾길 바라는 것은 모든 씨름 팬들의 바람이 아닐까?”

글=김정주 논설실장·사진=김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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