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 총재 김용
세계은행 총재 김용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10.3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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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 인생 뒤에는 어머니가 계셨다고 말한다. 퇴계 선생 역시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어머니 춘천 박씨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글자를 모르는 어머니도 자식을 훌륭하게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율곡 선생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는 5만원권 고액지폐에 얼굴이 나와 삼척동자도 다 아는 훌륭한 어머니이다. 그리고 대학자이자 국가적 지도자에게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리는 갈암 이현일(李玄逸,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의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이다. 그녀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인 국가적 수모기까지 겪으면서 한 가정의 평범하게 보이는 딸이자 가정주부이면서도 시가(媤家)와 본가(本家) 두 집안을 모두 당시 사회공동체의 기둥이 되는 가문(宗家)으로 일으켜 세운 분이다. 더하여 남편의 전처남매(前妻男妹)와 열 자녀를 제대로, 성인군자로 키워낸 분이기도 하다.

김 용 세계은행 총재는 취임사에 앞서 먼저 부모님을 소개하며 “저를 이렇게 키워주신 우리 부모님에게”라며 내빈들에게 박수를 부탁했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즉 세계은행은 2012년 4월 16일 김용(金墉, 1959~) 전 미국 다트머스대 총장을 세계은행 총재로 선임했다. 언론은 세계은행의 대주주인 미국의 추천 케이스이기 때문에 이변은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신선한 충격이었다. 세계은행은 유엔 및 국제통화기금(IMF)과 함께 국제기구의 하나로 꼽힌다. 이런 중요한 기구의 수장 자리에 경제전문가가 아닌 의사가, 비록 미국시민권자이기는 해도 이민 1.5세대인 한국인이 선임되었으니, 기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삼고초려(三顧草廬)해서 그분을 세계은행 총재로 모셨다. 이 방면의 선배격인 반기문(潘基文, 194 4~) 유엔 사무총장에 이은 또 한 번의 경사였다.

김 총재의 선임 과정에서 느낀 ‘신선한 충격’은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다시 한 번 증명했다는 식의 애국적주의적 감성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김 총재는 경제전문가가 아니다. 따라서 그가 세계은행 총재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또 다른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김 용 총재는 하버드대에서 의학과 인류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모교에서 의대교수로 봉직하면서 동료 교수와 함께 비영리 의료봉사기구를 조직해 활동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세계보건기구(WTO)와 공동으로 결핵과 에이즈 등 저개발국의 질병 퇴치를 위해 오랫동안 헌신했다. 이런 이력은 김용이라는 한 자연인의 삶이 그동안 어떤 가치를 지향해 왔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미국 아이비리그의 명문 다트머스대가 2009년 그를 아시아계 최초의 아이비리그 총장으로 선임하면서 선임 이유 가운데 하나로 ‘봉사 정신’을 든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저개발국의 질병 퇴치를 위해 펼쳐온 열정적인 봉사활동을 무엇보다 높이 평가한 것이다.

전문가가 아닌 김 총재가 세계은행 수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그동안 보여준 이런 봉사와 헌신의 열정이 빈곤 퇴치를 통한 세계평화를 목표로 하는 세계은행의 설립 이념에 맞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봉사하는 삶에 대한 김 총재의 열정은 가정교육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오늘의 자신을 만든 가치는 ‘부친의 실용성과 모친의 헌신하는 삶에 대한 강조’라고 말했다. 이민 1세로서 치과의사였던 부친(김낙희, 1987년 별세)은 한국계로서 미국에서 살아가는 데는 무엇보다 기술이 필요함을 조언하면서 의사자격증 취득을 권했다. 이에 비해 철학을 전공한 모친은 항상 자신은 누구이며,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니까 김 총재는 성인(成人)이 된 이후 모친이 강조한 삶의 가치를 부친이 권유한 기술로 실천하면서 살아온 셈이다.

김 총재의 모친인 전옥숙 여사(80, 철학박사)는 서울에서 경기여고를 졸업한 후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퇴계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이다. 이후 국제퇴계학회 활동을 통해 퇴계학의 가치를 조명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모국을 방문할 때면 틈나는 대로 도산서원과 퇴계 종가에 들르곤 했다. 미국 남가주대학의 한국학연구소장을 맡아 미국 학생에게 한국의 유교문화를 가르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력이다.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되어 그녀는 김 총재에게 늘 퇴계 선생과 같은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녀의 남동생은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에서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강의하는 전 헌 교수다. 전 교수는 김 총재의 외삼촌이며 성장기에 멘토 역할을 해준, 김 총재가 의지하는 멘토라는 사실도 성장기 김 총재의 가정교육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김 총재의 인격 형성 과정과 삶을 통해 자신을 낮추며 남을 배려하는 공동체를 우선하는 우리 선현이 보여준 삶의 자세가 21세기 오늘 세계인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인 ‘봉사’와 ‘헌신’의 정신과 다시 만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열쇠도 결국은 이것이 아닌가 싶다. 바람직한 삶에 대한 기준은 양(洋)의 동서와 때의 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동일하다는 생각이다.

김옥길 춘포장학재단 이사·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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