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같은 도서관
보물 같은 도서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10.1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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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가을이다. 가로수 길을 가다 뭔가 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떨어져 굴러가는 것을 보니 다름 아닌 동그랗게 생긴 도토리다. 약간 바람이 불라치면 더 많이 굴러 떨어진다. 덩달아 샛노란 은행도 떨어지고 있다. 밟으면 약간 미끌미끌한 것이 냄새도 제법 코리코리하다.

이 계절이 되면 지나가는 행인에게서 좀 차분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한편으론 이 거룩한 열매의 계절을 주신 조물주에게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기분이다. 여기저기서 왠지 사색의 정경들이 풍겨 온다. 바로 독서의 분위기다. 최근 현대풍의 서점이 거창하게 오픈되어 독서가들을 즐겁게 맞이하고 있다. 그래도 정통 ‘도서관’이야말로 고매하고 독특한 향취를 내뿜고 있다.

‘도서관’이라 하면, 도서·회화(繪畵) 등을 수집하고 정리·보관하여 이용자의 요구에 따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봉사하는 곳이다.

원래 ‘도서(圖書)’라는 말은 음양오행에서 나온 신비로운 말로 ‘하도락서(河圖洛書)’를 줄인 어휘다. 잠깐 그 어원을 ‘역경(易經)’의 철학적 이론을 설명한 ‘계사전(繫辭傳)’에서 보자.

天垂象 見吉兇 聖人象之 (천수상 견길흉 성인상지)

河出圖 洛出書 聖人厠之 (하출도 낙출서 성인측지)

“하늘이 상을 드리워 길흉을 나타내니 성인이 이를 본받았다. 황하에서 ‘하도(河圖)’가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낙서(洛書)’가 나와, 성인이 이를 본받았다”는 뜻이다. 하도에는 말(馬)같이 생긴 용(龍)의 등(背)에 55개 점이 있고 낙서에는 거북 등에 45개 점이 있었다고 한다. 즉, 하도는 ‘하늘의 이치’를, 낙서는 그 이치가 땅에 드리워진 ‘땅의 법칙’을 나타낸 것이다. 하도가 오행의 ‘상생(相生)’을, 낙서는 오행의 ‘상극(相克)’을 의미한다.

‘도서(圖書)’에 이러한 오묘한 뜻이 있고 천지의 신성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흔해빠진 보통의 어휘가 아닌 것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탈리아 태생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에게는 수식어가 많이 붙어있다. 5만 권의 책을 갖고 있는 지독한 공부벌레이자 언어의 천재로 기호학자이며 스토리텔러다. 그는 2년 반에 걸쳐 저서 ‘장미의 이름’을 집필했다. 이것은 고전문학의 입문서로 가히 만 권의 책이 집약된 결정체라 말할 정도다.

그 책에서 아드소가 화자로 등장하는데 그는 처음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 이런 말을 한다.

“그제서야 나는 서책끼리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서관이란 수세기에 걸친 음울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곳. 만든 자, 옮겨 쓴 자가 죽어도 고스란히 살아남는 수많은 비밀의 보고.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는 정복되지 않는 막강한 권력자였다”라고.

그는 책이 인간의 삶을 연장시키는 ‘유일 도구’로 생각했다. 한 인간이 소멸한다 해도 그 사람이 지녔던 경험과 지식·통찰은 책을 통해 타인에게 옮겨지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있는 ‘도서관’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까지 인간이 쌓아올린 모든 결과물이 집적된 완전체이며 소통의 광장이라는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 서가와 서가 사이를 조용히 걸으며 사색에 잠겨보고, 책들끼리의 관련성을 읽어내고, 새로운 지혜를 생각해내는 일.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우리는 하루 종일 휴대폰에 골똘히 고개를 파묻고 있다. 고결하고 거룩한 도서관을 ‘책들의 무덤’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 반성해야할 것이다.

김원호 울산대 인문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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