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평화의 한 수단
전쟁은 평화의 한 수단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10.12 20: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5년 11월 16일, 이수화학 울산공장에서 불산 1천ℓ가 누출되는 사고가 났다. 화학가스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울산은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성난 민심에 시당국은 갖가지 대처방안을 발표했고, 경찰은 공장장 등 책임자 3명을 사법처리했다. 불산 1천ℓ 누출에 화들짝 반응했던 시민과 당국이, 어찌 된 영문인지, 한반도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해서는 너무 무감각하고 남의 나라 일처럼 반응하고 있다.

지난 9월 15일 오전 6시57분쯤 북한이 쏜 화성-12형 미사일이 일본 홋카이도 상공을 지나 약 2천km 거리의 태평양에 떨어졌다. 만약 미사일이 일본 영공에서 불발해 그 잔해가 가옥이나 주유소, 발전시설물에 떨어졌다면 그 피해는 얼마나 컸겠는가. 일본정부는 북한 미사일 발사 직후인 오전 7시, 순간경보시스템 ‘제이 알라트’를 통해 전국에 비상경보를 발령했다. 홋카이도를 포함한 일본 동북지방 12개 광역자치단체 주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리자 출근길의 주민들은 급히 집으로 되돌아가거나 가까운 건물 지하로 대피했다.

일본의 대응은 북한 미사일 발사 3분후 경보→35분후 브리핑→63분후 NSC회의로 신속하게 이어졌다. 반면 한국정부는 북한 미사일 발사 6분후 평양지도부에 근접한 서해 쪽이 아닌 동해상으로 현무-2A 미사일(250km~300km 거리) 2발을 발사했다. 무력도발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는 것이 고작 미사일 2발이었고 그것도 1발은 발사 직후 불발에 그쳐 안보대처능력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상당수 국내 언론은 일본정부의 주민대피령을 ‘복닥소동’으로 폄하했다. 휴전상태의 적국 북한이 미사일실험과 핵실험을 여러 차례 해도 우리 정부는 즉각적인 대피훈련도 하지 않았다. 두 나라 중에서 어느 쪽이 정상적인 국가인가?

‘촛불혁명으로 탄생했다’는 문재인 정부는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는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고, 전쟁도 대화를 통해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군사옵션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어 절대 안 되고, 핵과 미사일은 평화적 수단만으로도 포기시킬 수 있다고 장담한다. 이러한 믿음은 전쟁과 평화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고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기인하고, 이는 잘못된 이해다. 전쟁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다. 즉 대화와 협상은 평화를 위한 외교적 최후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며, 전쟁 역시 평화의 수단인 것이다. 과연 평화는 대화와 협정만으로 가능한가? 6·15선언과 10·4선언 같은 남북한 공동선언과 협정이 한반도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가?

1937년 네빌 체임벌린이 영국 총리로 취임했다. 그는 히틀러가 재무장하고 이웃나라를 위협하는 것이 패전국 독일에 과중한 책임을 물은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불만으로 이해했다. 체임벌린은 베르사유조약의 시정만을 원한다는 히틀러의 말을 그대로 믿었고, 독일의 군비증강을 교섭으로 막겠다며 히틀러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1938년 9월 30일, 뮌헨에서 돌아온 체임벌린은 런던공항에서 군중을 향해 종이 한 장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히틀러의 서명이 있는 ‘영·독 불가침 서약’이었다. 체임벌린은 종이협정을 통해 “우리 시대에 평화가 도래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1년이 안 된 1939년 3월 15일, 독일군은 체코의 국경을 넘어 진격했다. 그래도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영토 욕심이 더는 없을 것으로 믿고 반격을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뮌헨회담에서 체임벌린을 평화 유지를 위해 싸우는 예의바른 인물이 아닌 ‘비겁한 벌레’ 쯤으로 보았다. 히틀러는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에 서명한 지 7주일 뒤인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2차 대전에 참전했다.

히틀러의 간을 키운 것은 체임벌린의 비겁한 유화정책이었다. 역사가들은 히틀러에 대한 초기의 대응이 강력했더라면 2차 대전의 참화는 막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국가 존립의 토대는 안보다. 밤은 깊어 가는데 안보경보등은 아예 철거된 듯하다. 히틀러의 사악한 야심을 일찍이 간파했던 처칠은 의회에서 뮌헨협정을 단호하게 반대했다. 국민에게 평화의 감언이 아니라 땀과 피를 요구한 처칠 같은 인물이 우리에겐 없는 것일까.

임현철 울산시의원 의원·예결특위위원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